진시영-빛과 소통, 그리고 사람
최흥철(미술이론,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진시영은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뉴폼(New Forms) 수학하고 귀국한 이후, 2006년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통하여 인간의 존재를 미로 구조 속에 갇혀 움직이는 실험 동물에 비유한 4채널 비디오 <Human Maze>(2004)를 발표하였고, 같은 해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되어 도시의 감춰진 모습과 그 안의 일상적 휴머니티를 영상과 설치를 통해 표현한 작품<광주, 일상의 단편들>(2006)을 연달아 발표한다. 그리고 <Alley>(2006) 시리즈를 통해 도시화로 인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다수의 다양한 장소특정적인 비디오 설치 작업들을 꾸준히 제작 발표하였다. 2008년을 전후로 전자 매체인 LED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빛의 점을 하나의 픽셀로 대비시키는 픽토그램(pictogram) 작업과 함께 그것의 스크린 지지대라는 기능적 구조를 넘어서는 미디어 구성품(component)로서의 유기적인 입체, 즉 조각적인 입체 스크린의 다양한 형태를 영상과 일대일로 결합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같은 해 광주시립미술관 인사동 분관인 빛 갤러리의 초대 전시에서 파도의 물결 형상으로 굴곡진 조각 <Wave>(2008)의 LED 스크린 위에 실제 바다 수평선과 일몰 영상을 3차원적으로 설치하여 본격적인 주목을 받았던 그는 본격적인 대형 LED 디스플레이 조형작품인 ‘Linking Spot’을 공공미술로 첫 선을 보였다. 이 즈음 그가 주목하기 시작한 바쁜 시민들의 역동적인 일상의 이미지를 픽토그램 방식을 적용하여 빛의 점(光点)으로 환원시켜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어울리는 즐거운 군무, 도시인들의 발랄한 에너지의 발산, 무질서하게 엉킨 이미지의 충돌과 융합, 혼란이 사라지고 정돈된 모습들이 사회 속의 협동하고 어울리고 소통하는 역동적인 이미지 순서대로 애니메이션 영상 속에 담았다. 이러한 연구의 결실은 기하 추상적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 된 빛 이미지를 출력하는 2009년 작 <Harmony>의 완전한 구(球) 형태의 스크린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의 움직임과 소통의 통합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주목은 <Sign>(2010) 시리즈를 통해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 영역으로 역행하는 모습으로 일종의 모호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시리즈의 작업은 일견 실제 인물들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여 디지털 코드화(coding)하는 짐 켐벨(Jim cambell, 1956~) 과 줄리앙 오피(Julian Opie, 1958~)의 광점 애니메이션의 유머러스한 버전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자의 작가들이 실제 객체의 움직임을 입력하거나 주요 파트에 센서를 부착하여 인물의 동작에서 개인의 특징적인 캐릭터를 추출하여 움직임의 알고리즘을 역으로 적용하는 방식이라면, 진시영의 방식은 신체 움직임을 프로그래밍(또는 입력)하고 개인의 잘 짜인 움직임과 인간의 상호작용성을 추상적 소프트웨어로 하여 비트의 이동을 아날로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작가가 다루고 있는 프로그램화 된 신체는 시각뿐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이 상호교류, 다양성이 감소하지 않게끔 데이터 스페이스와의 인터페이스(interface)로서 종합체를 유지해주는 장소(또는 지점)이다. <Sign> 시리즈는 사회적 기호로서의 인간이자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한 지점이며,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 1948~)의 사이버 펑크 소설 <뉴로멘서(Neuromancer)>(1982)에서 그랬듯이 네트워크 속에서 움직이는 미래적 존재로서의 정보 입자화 된 빛 사람의 본격적인 등장(또는 출력)을 예고하는 작품이다.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결합으로 인해 시공간과 시간에 이르기까지 시각예술의 실험 영역은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마르셀 뒤상, 만 레이, 라즐로 모흘리-나기 등)과 ‘다다’의 과감한 반예술 실험들은 비물질적 요소들과 움직임을 도입함으로써 ‘상호작용성’과 ‘가상성’이라는 시공간으로의 예술 확장을 이끌었다. 이러한 실험의 명맥은 백남준(1932~2006)과 존 케이지(John Milton Cage, 1912~1992)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플럭서스(Fluxus)로 다시 이어지며 비디오 아트 탄생의 기폭제가 된다. 진시영의 근작 <flow>(2011) 시리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익숙한 역사적인 장면과 대면한다. 이 작품은 백남준과 찰스 아트라스, 현대 무용의 혁신적인 안무가인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1919~2009)이 WNET/Tirteen TV 연구소와 함께 제작, 발표한 사이텔릭한 네온 효과의 <머스 옆의 머스>(Merce by Merce)(1975)와 여러 모로 비견될 수 있다. 존 케이지를 포함한 전위적 작곡가들의 전자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는 안무가 머스 커닝행과 그의 무용수들의 다양한 동작들이, 다른 각도의 카메라 영상 장면들이 아날로그 비디오 믹서기로 동시에 합성되고 망막을 자극하는 사이키델릭 아우라 광선을 뿜어대는 초현실주의 풍의 비디오 작품이다. 이후 <새장 속의 케이지(Cage in a Cage)>(1990)나 <다다익선>(1988),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well)>(1984)등 백남준의 대표적인 위성 예술을 포함한 많은 비디오 조각들에서 자주 상영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진시영의 <Flow>는 무용과 음악,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동시 협업한 영상작품이라는 점에서 백남준과 그 동료들의 위대한 아날로그 비디오 협업(collective work)이 이룩한 전자합성 작품의 오마주(homage)로 읽힌다. 그러나 비계층적 통합(Integral)으로써 모더니즘의 진공성에 격렬하게 대항하는 반예술적 전위인 백남준에 비해서 진시영의 낙관적인 관점은 ‘드가(Edgar De Gas, 1834~1917)의 사진과 발레와 움직임의 관계’에 보다 가깝다. 배경으로 흐르는 쏜살같은 가야금 연주 가락에 맞춰 움직이는 한국 고전 무용의 물 흐르는 듯한 춤사위를 정교하게 포착하기 위하여 마커(marker)로 사용하고 있는 LED 인공광의 점(dot)들은 이미지의 수적 재현과 물리적 공간의 사이버네틱스를 위한 센서 역할을 하며, 픽셀(pixel)의 실루엣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을 인터페이스 상의 그래픽 아이콘으로 만들고 있다. 무용수의 빠르게 움직이는 궤적들을 동시에 다각도로 포착하는 것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 1830-1904)의 동물 움직임 촬영법을 연상시킨다. 정보의 조각(bit)으로 이루어진 빛의 궤적은 암흑 공간 속에서 부드럽고 유연하게 휘어지고 전 방향으로 확산되어 간다. 반딧불이 몇 천 배 증폭된 듯한 차갑게 빛나는 전자 불꽃의 트랙들은 카메라의 물리적 움직임-수평적 이동(panning)과 진자(pendulum) 왕복운동, 주밍(zooming), 회전(rotation)-이 더해지며 상호작용적 사이버 스페이스 안에서 데이터의 불확정적이거나 혹은 유기적인 패턴 운동을 제시하고 있다.
백남준은 자신을 ‘정주 유목민(Stationary Nomad)’이라고 지칭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아이디어(정보)를 멀리 보낸다’는 의미로 고안한 그의 개념이다. 이것은 1974년 빛의 속도로 정보가 질주하는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Electronic Super Highway)’의 아이디어로 다시 연결되었다. 한 점(장소)에서 또 다른 점(장소)까지, 정보화된 빛의 선(wired)으로 거미줄처럼 다중 연결되는 정보화 고속도로에 대한 탁월한 직관과 통찰은 오늘날 보다 다원적이고 복잡성을 띠는 소통을 위한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의 탄생을 예견한 것이다. 진시영이 신체와 결합된 미디어 공간 안에서의 움직임을 정보화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시키려는 시도를 가시화하는 것은 예술과 문화, 그리고 삶 사이의 오랜 불가분성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의 유기체적인 신체(ecological body)는 미디어와 결합함으로써 공감각의 개별 분리를 통하여 감각이 몰입되고 거대하게 빛의 망으로 증폭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인간의 광학적 미디어 체험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자의 영역이 상호 반영되어서 감각 영역의 경계 확장에 기여할 것이다.
현현(顯現)하는 형상(figure)들, 그 영원성에 대하여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음악처럼 회화에서는, 즉 예술에서는 형태를 발명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힘을 포착하는 것이 문제이다. 바로 그 때문에 어떤 예술도 구상적이지 않다. 클레의 유명한 방식인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가 특별히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회화의 의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로 정의될 수 있다. 음악도 들리지 않는 힘을 들리도록 하는 시도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명확하다.
Gilles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Paris: Seuil, 2002, p. 57.
미디어 아트(media art)는 근대적 과학 문명의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물질적이다. 그것은 어떤 예술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image)를 제공하므로 구상(具象)이자 현실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는 만질 수 없는 이미지-빛-으로 존재하기에 비물질적이다. 그것은 허상이자 추상(抽象)이며 환상이다. 미디어 아트는 과학 기술을 토대로 작가의 내적 상상과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자유와 가능성을 선사했고 작가의 예술적 표현력은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원(電源)이 켜져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자유이다. 전원이 꺼지면 영원할 것 같던 마법의 세계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처럼 미디어 아트는 스스로 아이러니(irony)를 품고 있는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여기, 아이러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미궁으로 뛰어든 작가 진시영이 있다. 그는 미디어 아트라는 실타래, 그 얽힌 매듭을 풀기 위해 두 개의 대척점(對蹠點)을 초월하는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창조한다. 그리고 수수께끼의 정답으로 다음의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인간 세계의 –현실과 가상을 포함하는-모든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원성의 현현(顯現)이며 다른 하나는 기계와 인간, 구상과 추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상(figure)의 현현이다.
진시영은 미디어 아트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영원성에 주목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웨이브 Wave>(2008), <플로우 Flow>(2011) 시리즈, <운주사 Temple Unju>(2012)는 모두 영원함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그의 미디어 아트는 우리에게 두 가지 층위의 영원성, 즉 물리적 시간의 영원성과 주관적 시간의 영원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영원함은 인간 삶에서 중요한 문제였고 갈망의 대상이었으며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무상함을 경험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인류의 유산들은 유한한 시간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허무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인간은 과학적, 의학적 진보를 통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을 늘려나갔고 종교적, 철학적, 예술적 행위를 통해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을 늘려나가면서 영원성에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한편 영원이라는 것은 언제나 시간성을 내포하며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기에 영원성과는 상극인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필연적으로 변화를 유발하는 시간, 그 자신은 영원하다. 이러한 이유로 진시영에게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탄생되어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 스스로 영원한 것이며 영원성의 상징이 된다.
지속이라는 성질은 사실 지속되는 변화 위에 겹쳐져 있다. (중략) 예를 들어 “변화 없는 변화”라는 울프(Wolfe)의 표현이나 지속에 대한 베르그송(Bergson)의 발견은 “변화 속의 지속”이라는 괴테(Goethe)의 시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영원이라는 주제는 <웨이브>에서 가장 확실히 드러난다. 진시영은 내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영원한 존재인 시간의 알레고리(allegory)로서 광대한 자연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작가는 시간이 그렇듯 자연도 변화 속에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자연은 계속 변화한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가 태어날 때에도 존재했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변화의 상징이자 흘러가는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통로인 동시에 영원함의 상징이다. <웨이브>에 등장하는 조수의 흐름, 파도와 물결, 폭포, 일출과 일몰, 그리고 그것이 은유하는 태양과 빛은 흘러감-변화-과 지속(duration)을 동시에 상징한다. 하루는 시작을 알리는 일출과 종결을 알리는 일몰로 이루어진다. 해가 아침에 떠올랐다가 저녁에 지는 것처럼 만물의 시간도 그렇게 시작되고 끝난다. 작가에게 일몰과 일출은 매우 중요하다. 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일몰과 일출의 광경 앞에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압도의 순간을 경험한다. 이는 자연의 장관이 주는 숭고의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순간 자신을 되돌아보는 내적 몰입의 시간을 갖기 때문이다. 이에 작가는 관객들이 <웨이브>를 감상하는 동안 몰입의 시간을 갖고 순간 속의 영원을 경험하길 원한다.
영원성에 대한 탐구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흘러나오는 에너지(energy)를 포착하는 <플로우> 시리즈로 이어진다. <플로우> 시리즈에서 작가는 암전된 공간에서 몸에 LED(light emitting diode)를 부착한 채 춤을 추는 무용수의 움직임을 촬영, 편집하여 보여준다. 구체적인 몸의 모습은 사라지고 빛의 움직임만 남은 이미지는 만물을 관통하는 에너지와 끝없이 순환하는 생명력을 담아낸다. 순환 역시 이동과 변화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것은 돌고 돌기에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성을 획득하며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함축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의 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운주사> 역시 영원성에 대한 탐구이다. 진시영은 운주사(雲住寺)의 천불천탑(千佛千塔)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애니메이션(animation)으로 제작하고 LED 이미지로 석불과 석탑의 창조 과정, 하늘을 향해 오르는 석공들을 표현했다. 작가는 특히 운주사 이야기가 구전되어온 설화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설화는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설화는 그것의 사실성이나 정확성과는 상관없이 이미 하나의 상징물로서 영구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 속 존재들이 그렇듯 영원성을 갖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물리적 시간은 그 스스로 객관적인 지속과 변화를 함유한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은 상대적인 양상을 갖는다. 영원과 순간에 대한 인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느끼는 진정한 시간은 시계(時計)적 시간이 아니라 체험적 시간이며 그 체험적 시간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특수한 상황에 따라 유발되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주관성에 의해 결정된다. 미디어 아트 역시 그러하다. 미디어 아트는 물리적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그것을 감상하는 동안 객관적인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나 작품 속에 담겨진 시간은 작가적 선택에 의해 조작되고 편집된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일 분일수도, 천 년일수도 있으며 비(非)순차적일수도, 역행적일 수도 있다. 진시영의 작품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관객이 느끼는 시간 역시 주관적이다. 누군가는 찰나를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인류의 역사, 세계의 역사를 모두 담아내는 초월적 영원성을 느낄 것이다. 진시영은 모든 관객들이 작품 안에서 자신들만의 영원성을 체험할 수 있길 바란다. 작가는 예술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영원성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영원의 시간이 일순(一瞬)일지, 아니면 영겁(永劫)일지는 작가도, 관객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각자 자신만의 영원을 경험할 뿐이다.
영원성에의 탐구는 주제뿐만 아니라 매체에서도 찾아진다. 주제적인 면에서의 영원성이 순간과 지속을 넘나드는 철학적인 시간이었다면 매체에서의 영원성은 보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의 것으로서 전자(電子)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원한 예술품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의 발현이다. 진시영은 대부분의 작업에서 LED를 사용한다. 그것은 촬영되어 비디오(video) 영상으로 보여지기도 하고 입체적인 조형물에 부착되어 가상적 3차원을 뛰어넘는 실제적인 3차원 입체 영상이 되기도 한다. 이 경우 영상 없이도 작품으로 존립 가능한 미디어 조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기계를 사용하지만 기계 없이도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갖는 미디어 아트, 허상이 아닌 실제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만질 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한편 진시영은 LED를 사용하게 되면서 점점 빛을 통한 형식 실험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빛은 존재하지만 실체를 잡을 수 없고 경계와 형태를 지워버린다. 모든 사물은 고유하고 규정 가능한 시간과 공간을 지닌 반면 빛은 규정할 수 있는 시공간성을 지니지 않는다. 빛에는 변화하는 반복적인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빛은 물리적으로 한정된 경계-시간과 공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을 표현하는 데에 유효하다. 그런데 빛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성스러운 존재, 태양, 신과 같은 영원불멸하는 절대적인 존재의 상징물이었으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영원성뿐만 아니라 현세적 영원성 모두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진시영 역시 영원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면서 더욱 빛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편 빛은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는 기본 전제 조건이며 미디어 영상의 본질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것은 빛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빛과 영원성이 완벽히 결합된 작품이 바로 <플로우-나전칠기 Flow-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2011) 시리즈이다. <플로우-나전칠기> 시리즈는 다양한 형태의 나전칠기가 장식된 프레임(frame)에 <플로우>의 영상이 투영된 작품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서구적이고 과학적이며 인공적인 LED의 빛과 동양적이고 아날로그(analog)적이며 자연적인 자개의 빛을 완벽히 결합시킨다. 일련의 작품들에서는 움직임의 흔적들이 난초를 그려내도록 이미지가 조율되었는데, 이는 사군자로 대표되는 문인화가 필획(筆劃)의 운동감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원한 정신의 표현이라는 데에서 착안한 것이다. 정신성을 대표하는 사군자가 무용수의 춤사위로 그려졌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뿐만 아니라 세상의 근원적 기운과의 일치됨을 뜻한다.
<플로우> 시리즈의 경우 <플로우-나전칠기>뿐만 아니라 <플로우-디지털 사진 Flow-Digital Photography>이나 <플로우-회화 Flow-Painting> 작업으로 확장, 변주되었다. -회화의 경우에는 촬영된 실제 영상보다 더 반짝거리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선의 움직임을 강조하는 과정을 거친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같은 강한 운동감을 보여주는 <플로우> 시리즈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무용수의 동작을 담아내는 선들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구체적인 어떤 윤곽이나 형태도 재현하지 않는, 외부와 내부, 형태와 배경, 시작과 끝의 구별 없이 변이하며 연속되는 추상적인 선이다. 그러나 진시영의 <플로우>가 추상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행위를 기록했기에 구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진시영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추상성은 마음 속 관념만의 표현도 아니고 조형적이고 시각적인 실험에의 집중도 아니다. 대상의 실체를 지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에만 집중하지도, 감각에만 몰입하지도 않으며 세상으로부터 독립된 것도 종속된 것도 아닌 중간적이고 모호한 위치에 놓여있다. 어떤 것의 부정이나 선택도 아닌, 연결 또는 접속의 지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플로우> 시리즈에서 작가는 외적인 것을 재현-촬영-하지만 그것을 재현하는 데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으로 화면을 창조한다. 그의 작업은 외부 세계에의 경험인 동시에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형상과 색의 구성인 것이다.
이처럼 진시영의 <플로우> 시리즈는 구상도 추상도 아닌, 그 스스로 존재론적 가치를 획득한 형상으로서 존재하며 우리가 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실재에 접근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설명대로 형상은 이미지의 하나이지만 일반적인 이미지가 이미지 밖의 지시 대상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자족적이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형상적 공간에서는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실재하는 것과 상상적인 것 등의 구별이 모호하고 그것들 사이에 어떤 기준이나 척도가 존재하지 않아 현현하는 형상들을 향한 순수한 관조의 상태를 불러온다. 그리고 이 관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영원성을 체득한다. 진시영이 기계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의 작품이 차갑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물질-기계문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적인 감성을 적신다. 진시영의 미디어는 감성적이다. 그리고 열렬하다. 그것은 작가가 미디어 아트라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본질과 에너지의 흐름, 그에 대한 내적 사유까지 담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기계와 인간, 물질과 정신, 순간과 영원, 추상과 구상의 사이를 넘나든다. 그가 영원성을 찾기 위해 자연을 선택하고 무용수의 몸에 LED를 부착하여 에너지를 포착해냈을 때 이미 그는 미디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디지털(digital)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 안에 자연, 인체, 설화,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근원에 대한 사유와 같은 아날로그가 존재하기에 진시영의 작품은 내면의 울림을 이끌어낸다.
프리드리히 셸링(Friedrich Schelling)이 인간의 사유를 포함하여 모든 사물의 본질은 생명이라고 말했듯이 진시영은 미디어 아트에서도 생명력을 찾고자 한다. 진시영에게 미디어 아트의 본질은 차가운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와 생명력의 보고이며 정신성의 함축이다. 작가는 ‘예술은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킬 수 있으며 내적인 무언가를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디어 아트에도 적용된다.’고 강조한다. 진시영은 사물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지니고 있기에 딱딱한 벽을 뚫고 존재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 곳에서 약동하고 있는 숨결을 작품의 기원으로 삼는다.
우리 모두가 눈치 챘듯이 진시영은 미디어 아트라는 미궁의 출구를 한 번에 찾길 원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수수께끼의 답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작가에게는 미궁을 탐험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그 시간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작가는 스스로 미궁을 창조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
1) Hans Meyerhoff, Time in Literatur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0, pp. 16-17.
2) 도선(道詵) 국사는 우리나라의 지형을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보고 운주산을 배의 중심으로 보았다. 이에 배의 중심을 맞추고 우리나라의 기운이 다른 나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력을 이용, 도공들을 불러들여 하루 낮과 밤 동안 천불천탑을 조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자승이 닭이 우는 소리를 내자 놀란 도공들이 급히 하늘로 올라가 완성에 실패했다. 운주사에 미완성으로 보이는 석불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 전해진다.
빛이 된 인간, 그리고 Flow
우선미(예술학, 경기대 강사)
“빛”은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인 소재이다. 빛을 통해 사물과 세상의 이미지를 반영하고자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을 시작으로, 빛을 통해 사물의 이면을 보고자 했던 만 레이(Man Ray) 등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공의 빛이 도시를 수놓게 되면서 밤과 낮이라는 시간이 무의미할 정도로 혼재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을 예술가들은 명민한 눈으로 관찰하고, 드러내고자 했다.
빛이라는 것은 우리의 시각이 세계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로, 빛이 있어야만 우리는 어떤 대상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다. 그래서 빛은 시각과 뗄 수 없고, 그리고 그 시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은 세계-존재-인식으로 이어지는 고리 속에서 근본적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빛이라는 것에 예술가들은 많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진시영 작가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LED(Light-Emitting Diode)를 작품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Wave>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보여주는 바다 영상을 LED 조각을 통해 표현하였다. LED를 작업에 도입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주요한 이유는 형태를 가진 바다가 스스로 빛을 발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3차원의 입체 구조물 안에서 그 형태와 빛, 그리고 움직임을 스스로 발현하게 하기 위해서는 LED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손에 잡히는 바다, 빛을 통해 우리의 망막에 맺히는 신기루적 존재가 아닌, 손으로 잡히고 느낄 수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 바다를 문명이 만들어낸 인공의 빛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빛으로 형상화된 인간존재의 탐구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줄 작품들은 빛에 대한 상징적 의미부여와 함께 가시적 효과로서의 빛의 실험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빛에 대한 1차원적 해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의미화 작업과 함께 시각적 확장을 덧붙인 시도라고 여겨진다.
우선 빛에 대한 의미화 작업을 살펴보면, 인간 개체를 하나의 빛으로 상징화하여 그에 따른 움직임을 기록하고 편집한 후, 그 빛의 흐름들을 표현하였다. 이에 대한 생각의 단초는 최근 새롭게 나타난 관계도인 소셜네트워크로부터 시작한다. 페이스북으로 상징되는 소셜네트워크는 이미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지구상에 살고 있는 현생 인류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세계에서 새로운 관계들을 맺으며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도들은 작가가 그간 그려냈던 ‘인간적’ 시선들에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해준 시작점이 되었다.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작가는 개인적 존재들을 ‘빛’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각 개인이 표출해내는 움직임과 인간존재 사이에서 빚어내는 관계, 그리고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들을 빛의 흔적들로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발현은 LED의 2010년 미디어파사드 작품인 <Sign1>을 시작으로 <Sign2>, <Sign3>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Sign1>에서 빛을 인간 개체로 형상화시킨 작업을 처음 볼 수
있었고, 실제 퍼포머에게 LED 옷을 입혀 움직임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Sign2,3>부터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아가 이번 개인전에서는 그 흔적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퍼포머의 움직임이 빛의 흐름과 흔적으로 표현되어 “관계”라는 의미를 생성하게 된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춤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는 점인데, 개인이 빚어내는 움직임이자 세계와 소통하는 몸짓언어이며 본능적 움직임의 예술인 춤을 빛의 흐름으로 기록하여 인간존재에 관한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시영 작가는 인간이 빚어내는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움직임을 빛의 흐름과 흔적으로 표현하여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계가 소통하는 방식을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공빛과 자연빛의 결합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빛의 시각적 효과에 대한 탐구인데, 이를 인공의 빛인 LED와 자연의 빛인 자개와의 결합으로써 풀어냈다. 물론, 자개의 사용을 시각적 효과에 대한 실험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개가 함유한 많은 맥락(context) 때문에 감각적인 효과 차원으로만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 맥락 때문에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라는 상투적인 해석으로 치부할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이고, 작가가 그간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던 기술매체 속에서 자연성의 발현이라는 맥락을 고려해보았을 때, 이러한 지점이 적절하다 판단된다.
그렇다면, 과연 원색의 강렬한 인공의 빛들이 자연이 만들어낸 빛의 산물인 자개와 무사히 어울릴 수 있을까? 인공의 빛들이 너무나 강렬해서 자연의 빛들이 숨죽여버리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의구심들은 빛이 형성하는 형태와 모양, 그리고 배치를 통한 조화로써 해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자개가 들어간 모니터 프레임을 시선의 위치를 고려하여 사이즈를 조율하였고, 모니터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자개 프레임 위로 그 형태와 연결된 형상으로 빛 영상이 흘러나왔다. 서로의 형태와 가시적 효과를 침범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빛에 대한 시각적 효과에 대한 실험은 앞서 언급한 2008년 작인 <Wave>에서 그 시작을 불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을 촬영하여 동시에 LED를 통해 나타냈었는데, 이때는 자연의 빛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LED의 인공빛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즉, 자연의 빛을 기술매체를 통해 기록하여 이를 LED라는 인공적 빛의 광원을 통해 발현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LED 빛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기록하여 자연적으로 발현되는 빛과 함께 재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적 빛과 인공적 빛에 대한 시각적 효과 차원에서의 실험을 다양한 방법론을 가지고 시도하고 있으며, 단지 감각적 차원에서의 실험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인간의 기술적 매체와 자연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통로로서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시영 작가에게 “빛”이란 이처럼 다양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빛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인간의 에너지가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빛의 흔적들은 아름다운 기운을 내뿜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세계가 만났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연과 인간의 기술문명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감한 빛의 실험으로 세계와 인간을 표현하고 있는 진시영 작가의 작품은 다양한 기술매체를 이용하고 있는 현대미술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을 구축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진시영의 작품세계
변길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진시영의 미디어 작품에 있어 핵심적 주제는 소통과 흐름이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빌 비올라의 작품을 보고 낯설어하던 서양화과 학생의 신분에서, 이제 흐름(flow) 라는 주제를 관객들에게 던질 수 있는 미디어아티스트가 되기까지, 매체는 변했을지언정 그가 일관되게 생각하는 주제는 동일했다.
이번 작품의 시작점은 LED를 재료로 쓴 “물결(Wave)” (2008) 이라는 영상작품이였다.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했던 진시영에게 색체의 근본은 항상 화두처럼 느껴지는 과제였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의 색깔을 표현하고, 스스로 비추어진 빛을 발하는 잔연물을 표현하는 데에는 LED를 이용한 영상작품이 최적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전시는 영상이라는 매체를 지속적으로 다루어 온 그의 작품세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영상작품들은 주제와 소재 면에서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이번 전시의 제목처럼 흐름(Flow)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진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흐름이라는 것은 작품에서 쓰이는 빛이라는 소재의 흐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소통과 흐름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진시영은 그의 주제를 영상 면에서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다. 영상을 들여다보면, 점이 흐르고, 선이 흐르고, 색이 흐르며, 그것들이 어우러져 빛으로 조형화되는 미적 객체들이 등장한다. 즉, 아름다움의 대상물들을 빛으로 해체하여, 흐름을 통해 다시 복원하는 것이다. 순서는 역순이다. 작가가 관객에게 해체의 과정은 보여주지 않지만, 빛나는 점에서부터 시작해서 흐름으로 연결되어 형상이 나타나는 순간, 관객들은 흐름을 통한 미적 객체의 완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있으며, 더 정확히는 흐름에 있다. 작품을 가지고 유희를 하고, 과정에 대한 관조를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작가 진시영은 스스로 미디어아티스트로서 완성의 과정을 향해 가고 있다.
둘째, 위에서 언급한 흐름이라는 그의 주제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전시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영상의 액자테두리를 나전칠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가 2010년에도 나전칠기를 액자의 소재로 이용한 적이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대부분의 영상작품의 테두리를 나전칠기로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나전칠기는 한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공예물로서 특유의 각도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운 색으로 유명한 것이다. 이것 자체의 아우라가 대단하기 때문에 함부로 액자로 썼다가는 오히려 주인인 영상 자체가 죽을 수가 있다. 결과는 어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강하디 강한 나전칠기의 검은 바탕위의 찬란한 색상을 그의 영상과 조화시켰다. 그가 선택한 빛의 소재는 LED였고, 특수 제작된 의상을 입은 한국무용가가 추는 춤동작은 그 춤에 맞추어 편곡된 가야금 소리에 맞추어 녹화되고 특수영상으로 처리된 후, 빛의 선과 흐름으로 재탄생하였다. 이번 전시에 같이 출품된 회화작품은 LED 빛의 잔상을 담은 빛으로 그린 드로잉이자, 빛과 색이 가지는 찰나적인 아름다움을 회화적으로 정지시킨 그의 단면이다.
이번 7월 광주시립미술관 청년작가 초대전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천착했던 FLOW라는 영상시리즈 이외에 영상을 회화로 재현한 전통적인 회화작품, 사진 작품, 설치 작품 등 영상 이외의 다양한 작품들도 같이 선보이게 되어, 그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신작 <운주사>는 한국의 전통적 소재를 빛과 영상으로 구현한 것으로서 진시영 작가의 새로운 도전으로 간주될 만하다.
< 디지털 휴머니티 >
– 뜨거운 미디어
신 민 (진화랑 기획실장)
“모든 미디어는 인간이 지닌 재능의 심리적 또는 물리적 확장이다. 바퀴는 (···) 발의
확장이다. 책은 눈의 확장이다. (···) 옷은 피부의 확장이다. (···) 전자회로는, 중추신경계의
확장이다. 미디어는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 내부에 있는 특정 부위를 자극하여
지각하게 한다. 그야말로 감각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 유형 –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 을 변화시킨다. 이런 부분이 변화함에 따라, 인간도 변화한다.”
(맥루언/피오르, 『미디어는 맛사지다』, P. 26-41)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로 영혼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잭슨폴록식 추상회화를 뜨거운 추상이라 부르고, 철저히 감정을 억제하고 순수 기하학적 조형 요소만으로 절제된 화면을 구사했던 몬드리안식 추상회화를 차가운 추상이라 부른다.
디지털 기술을 재료로 하는 미디어아트는 보통 그 과학적 성격 때문에 차가운 예술로 간주되곤 한다. 차가운 추상이 예술을 삶과 분리시켰듯이 디지털 아트의 차가운 이미지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을 주곤 한다. 디지털환경이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아트가 가슴을 적시는 예술로서의 역할을 하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진시영 작업의 의미 및 효과는 바로 이러한 난제를 넘어서는데에 있다. 그의 <Wave>작품 - 바다의 물결치는 형상의 조각에서 일몰과 일출 장면이 LED 조명으로 발광하는 작품- 이 그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출발은 작가 자신이 삶에서 치유를 얻었던 경험 – 바닷가의 일출, 일몰 풍경을 관조하는 순간- 을 다수에게 예술로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살아숨쉬는 자연의 감동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허상적 이미지로 인식되는 영상을 실체적 형체 속에 담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인공의 빛 중 가장 밝은 발광 효과장치인 LED로 실제 자연의 빛이 지닌 찬란함을 표현해 내고자 했다.
또 다른 하나는 나전칠기와 자개, LED 조명, 인간, 춤이라는 요소가 융합되어 이루는 스토리텔링이다. <Flow>시리즈는 한국 무용수의 몸에 LED 조명 칩을 달아서 그의 춤 동작에 의해 생겨나는 빛의 흐름으로 무한 반복적인 영상이 재생되는 작업이다. 여러 색채로 바뀌는 조명이 움직임에 따라 겹쳐지고 흩어지면서 화면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다채로운 선형의 그림으로 채워진다. 점과 선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추상적 이미지, 다양한 변화를 거듭하며 스케치하듯 그려지는 그림은 마치 회화적인 그림을 접하는 것과 같다. 화면 외부에는 자개로 수놓아진 나전칠기로 프레임이 디자인 되어있다. 꽃 형상의 자개장식 나전칠기 조각이 모니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형식의 작품도 있다. 영상이 꺼진 후 그 실체가 사라져버렸을 때 예술로서의 의미가 공중 분해되어 버리는 점에 대한 대안으로 영상이 꺼진 후에도 예술로서의 존재의미를 지니도록 고안한 것이다.
진시영의 작업은 인간이나 자연이 살아움직이는 순간에 생성되는 에너지의 흐름을 가시화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공기 속에 흐르는 에너지는 물리적으로 결코 잡을 수 없고 볼 수 없다. 작가는 비물질적 흐름의 속도와 잔상을 무한히 이어지는 빛으로 발현시킴으로써 결코 잡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 흘러가 버리는 순간을 무한히 붙잡아 두고 싶은 불멸성, 영원성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킨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흐르는 듯한 상상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나전칠기가 전통이라는 과거를 디지털은 미래적 이미지라는 점에서도 과거와 미래의 흐름이 전해진다.
흐름을 붙잡아 두려는 의지는 회화작업으로 확장된다. 영상의 내용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선택하여 캔버스에 오일로 그려낸 Flow 시리즈의 평면작업들이 그것이다. 마치 영상 캡쳐 사진같이 보이지만 직접 그려지는 동안 부분부분 빛의 묘사가 강조되어 있어 더욱 입체적이고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임의적으로 강조한 선과 색은 무용수의 즉흥적 동작으로 만들어지는 화면의 우연적 성격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인 면에서 모두 디지털 공간과 아날로그 공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표현은 디지털 기술로 인간의 정서를 만족시키는 완전한 디지로그의 구현이다. 가장 비인간적인 디지털 기술이 붓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인간의 온도를 나타내는 요소가 작업 전반에 깔려있는 점, 우연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진시영의 작업은 휴머니티를 전제로 하는 뜨거운 미디어 아트로 범주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백남준의 위대함은 작품 속에 미래적인 기술과 과거의 서정적 모습들을 교차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과 자유로움, 그리고 일상생활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는 데에 있다. 진시영의 미디어 아트 역시 단지 미래적 장치의 기교를 넘어서는 뜨거움과 서정성이 담긴 의미 있는 진술로서의 예술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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