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형 (대표, Hzone)
이번 전시 타이틀 <동방박사>는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뜻하는 “동녁 동”자 대신 “움직일 동”자를 차용해, 작품의 서사구조가 다양한 방향으로 열려 있고, 그 방향 또한 자율적으로 정해질 수 있다는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탄생한 공간은 이원론적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공간이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시간구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 그러나 이 같은 의도된 “빈틈”을 만들기 위한 이이남의 전략은 매우 구체적이고 논리적이며 치밀한 계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환원구조에서 출발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반복되는 사계절의 순환, 소녀가 노파로 다시 소녀로 시간의 논리를 거스르는 젊음의 환원,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다시 삶으로의 환생 등 이이남의 작품은 환원구조를 고집한다. 그것도 단순히 시간의 역전 현상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의 비판의식은 사회고발적이다. 금강전도, 2010>는 인류의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폐허가 된 금강산에 포탄을 대신하여 눈 형태로 내리는 문자를 통해 이를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곳에 가고 싶다, 2010>에서는 스포츠 중계에서나 보일 법한 클로즈업과 숨겨진 장면을 포착하기 위한 다양한 앵글을 통해 가장 고즈넉해야할 옛 풍경을 다이나믹하게 바꿔 버린다.
이이남 작품 속에서 공간은 시간과 같은 층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디지털 미디어 작품 속에서 시간의 역할은 공간의 그것보다 상위에 놓인다. 시간이 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시간 개념을 먼저 산정해야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간에 대한 상상과 해석을 먼저 끝낸 다음, 그 위에 어울리는 공간을 매칭 시키는 방법으로 사건의 이음새가 연결된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대부분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뚱맞은 시간과 공간의 만남이기에 불협화음으로 보일 만도 한데 관객에게 보여지는 결과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의도된 간극이 결코 불연속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다름 아닌 “프레임”의 활용에 있다.
프레임은 “안”과 “밖”을 구별시키는 장치이다. 또한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는 프레임의 속성은 합법적인 “왜곡”을 가능케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심과 주변, 주인공과 배경을 구별해 주는 프레임은 공간을 둘로 나누는 훌륭한 경계선이다. 그런데 이이남은 이 프레임의 전통적인 역할을 해체해 자기식으로 재구성한다. 그에게 있어 프레임은 공간과 공간을 나누는 경계가 아닌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또한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의 소통을 유도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통은 작품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일어난다. 일종의 창문이 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과 그 너머로 보이는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 내는데, 중요한 것은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 스테이지와 관객 사이에 모니터를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이 브레히트적 소격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개미 루이 14세, 2010>에 등장하는 프레임은 억압과 권력의 상징으로 변질 된다. 전통적인 서양화 액자에 그려진 루이 14세 초상화와 그 옆에서 작품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의 모습은 마치 감옥의 쇠창살 안에 갇힌 주인공과 이를 지키는 간수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미술관이라는 문맥 속에 갇힌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더욱더 가두어 버리는 프레임을 희화하고 있는 작가의 통찰력은 미술관 안에서 화석화되어가는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봐야한다.
작품 속 권위와 억압의 장치로서의 프레임을 해체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개미라는 에이전트를 등장시킨 것이다. 개미들이 몰려들어 프레임 속 루이 14세 그림을 한 조각 한 조각 씩 프레임 밖으로, 다시 미술관 밖으로 끄집어내어, 옆 모니터로 옮기게 만들었다. 한 조각 씩 움직이게 만든 단순 노동이 엘리트의 상징인 미술관의 경비 벽을 뚫은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미술관 프레임에서 자유로워진 루이 14세는 다시 관객의 눈앞에 놓인 프레임 안에 갇히는 아이러니를 노출한다. 이는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세계 명화를 모니터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는 이이남의 전략과도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개미의 모습으로 주로 등장하는 작품 속 에이전트는 이후 나비로도, 잉어로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약자이고, 자연이고, 속임수 없이 단순하다. 그래서 권력, 전쟁, 영웅주의에 대항하며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한다. 때론 개미가 되어 노트르담 대성당을 소치의 산수화 속으로 옮겨놓기도 하고(노틀담 성당과 소치의 산수화, 2010), 때론 나비가 되어 전투기들의 공습을 쫓아내기도 한다(도포, 역사 다시쓰기, 2010).
이이남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서양의 명작과 동양의 명작이 서로 소통하는 이야기 구조에 있다. 특이 하게도 그가 선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고흐, 쇠라, 마네, 모네 등, 빛을 중요시했던 인상주의와 조선시대 혹은 명청시대의 산수화로 요약된다. 빛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영상형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명화를 찾다보니, 대상이 아닌 빛을 그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미지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이남에게 있어 동양화는 죽어 버린 과거의 시점을 의미한다. 여기에 작가는 생명을 부여하는 장치로 빗방울, 꽃, 새싹, 나비, 보름달 등을 등장시킨다. 때론 사계절로 변화는 풍경을 부여해 순환하는 시간을 입히기도 한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영상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쉽게 넘어 버리는 위트와 유머를 자랑하게 된다.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같은 목적 아래 이야기가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작가가 동양과 서양의 명화를 해체하면서까지 만들어 놓은 중간계의 완성된 모습으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 일단 하나의 프레임을 가지고 다양한 시점과 공간을 분리시키기도 하고 연결시키기도 하는 전략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화면 밖이 아닌 안에서 유효한 것이다. 이 한계에 이이남 작가가 도전해야 한다. 미디어 아트란 화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소비하는 다양한 방법의 구현 속에서 발전하는 속성을 지녔다. 사람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動방박사”를 기다리고 있다.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비욘드(beyond) 남준 – Lee 이남
조숙경(이학박사(과학사), 국립광주과학관 전시연구본부장)
30년 전에 미디어아트라는 신세계를 열었던 백남준은 “달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라고 선언했다. 도대체 달이 어떻게 텔레비전일 수 있는가? 전자파를 쏟아내는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상징인 텔레비전이 저 고요하고 순수한 달과 같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시관 벽면에 걸린 흑백 모니터에서는 닐 암스트롱의 말이 반복되고 있다. “한 사람에게는 작은 한 걸음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은 인류에게 위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라는. 백남준은 ‘위성 프로젝트’로 불리는 시리즈 작품을 통해 기술의 진보로 인해 텔레비전이 밤하늘의 달을 대신하게 된 현대사회의 비인간화와 소외감을 날카롭게 직시한 것이다.
2014년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은 “세례 받는 텔레비전”이라는 흥미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천장에 매달린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하얀 비둘기가 계속해서 날개를 퍼뜩 거리고, 모니터 바로 아래에 있는 커다란 수조에는 물이 그득하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죄 사함을 받듯, 텔레비전은 천천히 물에 잠기고, 침례 받는 텔레비전은 그것이 가진 해(harm)와 독(poison)을 정화하여 의(義)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이남은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최첨단 테크놀로지에 이제는 반성과 느림이 필요함을 종교의 형식을 빌어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인간화된 기술’, ‘인간을 위한 기술’을 강하게 추구하던 백남준의 프로젝트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종교를 통해 순수하게 재탄생할 테크놀로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융합의 최전선에 서있다.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
류병학(미술평론가)
이이남 왈, “전시 타이틀에 ‘굿바이’ 대신 ‘굿나잇’을 고심 끝에 붙였습니다. 아침이 밝으면 일어나듯 다시 위력을 떨칠 여지를 두고자 했습니다.”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 굿나잇 아날로그 아트, 굿모닝 디지털 아트? 굿바이 아날로그 아트, 비기닝 디지털 아트? 그렇다면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이 아날로그 아트의 종말과 함께 디지털 아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굿바이 아날로그 아트, 비기닝 디지털 아트’라고 표기하지 않고 왜 이이남은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이라고 명명했을까? 그렇다! 아날로그 아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날로그 아트는 미술시장에서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듯 고가로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날로그 아트는 마치 ‘피크 오일 생산’처럼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피크 오일 생산’은 아날로그 아트를 제작하는데 사용되는 원자재들의 양적 감소를 뜻한다기보다 차라리 질적 측면에서 새로운 작품의 생산 감소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오늘날 아날로그 아트는 어느 시기보다도 양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을 표방한 아날로그 아트 측면에서 보자면, 아날로그 아트는 서서히 감소하는 반면, 디지털 아트는 차츰 부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은 저물어가고 있는 아날로그 아트와 부상하고 있는 디지털 아트의 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이남은 전시 타이틀에 ‘굿바이’ 대신 ‘굿나잇’이라고 표기한 것에 대해 “아침이 밝으면 일어나듯 (아날로그 아트가) 다시 위력을 떨칠 여지를 두고자 했다”고 답변했다. 이이남의 ‘고심’을 읽을 수 있는 발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필자 역시 아날로그 아트가 다시 위력을 떨치기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을 저물어가고 있는 아날로그 아트와 부상하고 있는 디지털 아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왜 아날로그 아트가 저물어가고, 디지털 아트가 부상하는 것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굿나잇 아날로그 아트, 굿모닝 디지털 아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언급한다는 것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구한 아날로그 환경에서 디지털 환경으로 전환되는 오늘날의 복합적인 상황과 얽혀 벌어지고 있는 동시대적 경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지난 20012년 12월 28일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오픈한 이이남 개인전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을 통해 윤곽을 그려보도록 하겠다.
이이남의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 개인전은 크게 4개의 파트로 구분될 수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1층 1전시실과 3전시실에 전시된 ‘광주’를 테마로 제작된 작품들, 1층 2전시실에 설치된 ‘뒤샹과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 작품들, 2층 4전시실의 명화를 재매개한 작품들, 2층 5전시실의 다양한 디지털 기기들을 사용한 디지털 퍼니처(Digital Furniture) 작품들이 그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지면에서 이이남의 ‘명화 재매개’를 가능케 한 사항들, 즉 이이남의 정체성(작가 의식)과 명화의 재매개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새로운 미술관/갤러리로 태동하고 있는 디지털 퍼니처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사항이 있다. 필자는 이 지면에서 이이남의 트레이드마크로 불리는 ‘명화 재매개’ 작품에 대해서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언급했다. 따라서 필자는 이이남의 ‘명화 재해석’을 지난 2011년 아트센터 나비에서 개최된 이이남 개인전 <<명화가 살아있다>> 도록에 실린 텍스트의 부분을 발췌하여 이 지면에 인용했음을 밝힌다.
32년
이이남의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 개인전이 열리는 곳은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이다. 상록전시관은 숲과 산책로 그리고 새소리가 들리는 도심 속의 상록근린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상록전시관은 중외공원 내에 위치한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시립미술관 본관과 달리 일종의 주택을 개조한 전시관이란 점에서 아담하게 느껴진다. 머시라? 전시관 이야기보다 작품 이야기를 해달라고요? 외람되지만 이이남의 작품 이야기를 하기위해서라도 전시관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상록전시관 입구를 들어서면 탁 트인 로비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로비 천장을 올려다보면 세로의 검정 돌판에 한자로 ‘서기 1981년 8월26일’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건물 상량식을 한 날짜다. 그렇다! 그 건물은 군부독재시절 세금으로 건축된 것이다. 그 건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할 때 숙소로 쓰려고 했던 일명 ‘지방 청와대’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지방 청와대’는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자 광주시민들의 반발로 인해 용도를 바꾸게 되었다.
2002년 전남도는 그 건물을 매입하여 아파트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아파트 건축은 사업성도 낮고 지역 환경단체들의 반발까지 더해져 포기한 바 있다. 2004년 광주시가 그 건물을 매입했다. 물론 광주시 역시 그 건물의 용도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 때 도립국악단 연습장으로 사용된 적이 있어 광주지역 공연예술계는 ‘광주에 미술관련 시설은 많으니 공연관련 공간으로 내달라’고 요구했단다. 그러나 광주시는 그 ‘지방 청와대’를 시립미술관의 다목적 전시관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결정하여 지난 2008년 광주시립미술관 분관으로 문을 열었다.
상록전시관은 1만8128㎡의 부지에, 전체 건축면적 1861㎡ 규모로 지하1층, 지상2층의 본관동과 부속동으로 이뤄졌다. 옛 ‘지방 청와대’의 모습을 보전하면서 내부는 현대적 감각으로 리모델링했다. 본관동 지상1, 2층에는 각각 옛 건물 당시 중앙홀과 방으로 쓰였던 공간을 개조해 6개의 전시실로 꾸몄다. 2층 야외 공간은 데크로 조성되어 상황에 따라 야외전시실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이남 왈, “상록미술관은 옛 전두환 관저로 불러졌던 곳입니다. 적어도 광주작가라면 그곳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여타의 화이트 큐브(중성적 전시장)에서 전시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관객이 상록미술관 입구를 들어서면 로비 가운데 설치된 수직의 거대한 작품을 만난다. 서울·부산·인천 등 전국에서 모은 15대의 낡은 텔레비전이 건물 상량식 날자가 새겨진 곳을 향해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져 있다. 흥미롭게도 15대의 낡은 텔레비전은 한결같이 15개의 가구 안에 놓여있다. 대한민국 최초 국산 TV는 1966년 금성사에서 생산한 흑백TV이다. 당시 TV는 마치 안방의 귀한 물건처럼 가구 안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당신이 TV를 보고자 한다면, 가구의 문을 열고 일명 ‘요술 상자’로 불렸던 TV를 켜야만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 TV는 컬러 세상을 흑백으로 보여주었다.
상록미술관 로비 센터에 설치된 15대의 TV 중 맨 아래의 TV가 켜지면 광주 금남로의 옛 전남도청을 배경으로 분수대가 등장한다. 그 분수대를 중심으로 차들이 달린다. 적어도 광주시민에게
Lee-nam Lee’s work
Rebirth of light, ‘a baptized TV set’
Ok-real Kim, Art Director of Contemporary Art Institute of Korea
The theme of Lee-nam Lee’s exhibition, ‘Becomes light’ is about rebirth of light (Reborn light). What is the meaning of light that an artist, Lee-nam Lee pursues through his work of art? According to him, our contemporaries’ fearin modern society is like a locomotive that is out of order.He asks himself what is needed for our contemporaries to relieve fear and not wander through shadows.
Lee-nam Lee’s thought process to find out the meaning of life is expressed metaphorically in one of his works, ‘a baptized TV set’.He symbolizes death by submerging a TV set in water, which is reborn whenit rises out of water. He presupposes that a human being made up of a body and soul is similar to a TV set that has a frame and contents. He has been experimenting with lots of thematic matters including ‘tradition and modernity’, ‘the Orient and the Occident’, ‘nature and civilization’, and ‘originality and duplication’, trying to go beyond the boundaries of time and space with the aid of advanced multimedia. For this exhibition, he has created an interesting installation piece called ‘a baptized TV set’, in which he submerges a TV monitor screening doves in water and then gets it out of water.
If we suppose that a TV set gets baptized, what could be the differences between a TV set before baptism and that after baptism? There could be lots ofviewpoints arisen from the process of discoursesregardless of what his intention of the work really was in the first place. For him, the metaphor of a TV set that becomes light beyond death symbolizes our fragile contemporaries facing fear of modern society. It refers to as one’s subconscious desires that satisfy the true goal of enjoyment, ceaselessly challenging society, a solid system that is full of factors of inhibitation. As a French philosopher, Jacques Lacanpoints out, the pursuit of real enjoyment, jouissance, is related to the Real that is beyond our reality like excessive desires can be described as desires toward death.
By showing us his work of art, ‘a baptized TV set’ drowned in water that meets its death to be reborn, Lee-nam Lee alludes to a fake sublimation that makes a person be in a state of being alive and dead at the same time, through which the true goal of his or her suppressed desires is achieved. He expresses death by submerging a TV set in waterbecause death is a precondition to being reborn, saying that his TV set, an electrical device doomed in water, symbolizes a person’s courage to overcome his or her trauma. In that sense, ironically, the moment of death symbolizes the time when that person overcomes his or her pain by facing the pain.
Jouissance, a theory of Lacan,connotes excessive desires for resistance and subversion as a means to secure satisfaction. Excessive desires accompanying pain rather than pleasure lead a person to the shadow of death, making that person face factors of inhibition. Therefore, to avoid the encounter of death, that person reflects his or her imaginary state in a substitute that can be a shelter from death.
A TV set, in which human beings are reflected, is perhaps something that symbolizes human beings themselves, conveying splendid light that expresses the sense of loss and isolation that we experience while living in society, which forces us to obey rules and give up on liberation. No matter what we choose to do, our subconscious desires are not free from being controlled by consciousness in the world that is full of illusions.
When seen from the aspect of socialization process of a human being, the meaning of light that Lee-nam Lee perceives is similar to the fact that a person cannot recognize himself or herself without the Other like it is impossible for a person to see himself or herself without a mirror. The meaning of light in his work, ‘a baptized TV set’ is about light of life because only light is able to be reborn after its death.
Lee Lee-Nam. Selection and Use.
Bernhard Serexhe
My very first encounter with a work by Lee Lee-Nam — Korean Eight-Fold Screen (2007) in the exhibition Thermocline of Art: New Asian Waves curated by Wonil Rhee (ZKM Center for Art and Media Karlsruhe, Germany, June 15–October, 2007 — was a delightful surprise and made an indelible impression on me. A large folding screen with eight vertical wood-framed panels displayed natural motifs familiar from traditional Korean ink wash paintings: landscapes, snow-covered boughs of trees, branches with blossom, ponds with colorful fish, some with Korean characters running from top to bottom which I am unable to read. While contemplating the work I suddenly became aware of slight movements, which first irritated me: snowflakes descending infinitely slowly, the fluttering of butterflies’ wings, the silent gliding of fish through water, and the gentle swaying of blossom in the wind. Small colorful birds flew across the screen unhampered by the wooden frames of the folding elements. A closer look revealed an entire natural world in the eternal cycle of creation and decay, which surprised me because it ran counter to all accustomed viewing habits. Paintings and drawings do not move; movement is found in film, video, and animation. At that moment I realized that the “panels” of the folding screen were large flat screen video monitors and that the artist had produced a bewitching combination of very old motifs and the latest technology.
To the question “Is media art the vehicle to make things come true?” Lee Lee-Nam replied, “I used to make sculptural works, and I felt limited to express the purpose of the work, because it’s bound to the material, the sculpture. Later, I was acquainted with media art, and it allowed me to overcome the limitations ... It helped me to make it closer to my idea and concept which I had dreamed about.” (Video interview, Korea Artist Project, 2011)
Korean artist Lee Lee-Nam was born in 1969 in Damyang (South Korea). He studied sculpture in Gwangju where he graduated in Fine Arts in 1995. After an intensely creative period in which he learned to work with traditional and new techniques and materials and his enthralling works were exhibited in many solo and group shows which won him international acclaim, Lee Lee-Nam continued his art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nd Arts of Yonsei University in Seoul (2011) and at the prestigious College of Fine Arts of Chosun University in Gwangju. There he gained his doctorate in Fine Arts in 2013. He remains faithful to his city of Gwangju, where he lives and works. The recipient of many awards, Lee Lee-Nam is represented in over fifty important collections.
Although Gwangju in South Korea can be regarded as an exemplary center of the democratic and cultural renewal of Korea, many of the artists who live and work in this city have just as close links to Korean traditions as to the advantages of creatively using new media in the sense of a new departure. When painters and sculptors turn to using new materials and techniques, the consequence is often, but not always and exclusively, that they discover the almost limitless possibilities of expression offered by images for computer and video monitors which becomes their medium of choice. The Korean pioneer Paik Nam June is internationally acclaimed as the founder of video art. And since the early 1970s many Korean artists have followed his lead and have founded a specifically Korean tradition of media art. One of the most creative and original is Lee Lee-Nam.
Just as during the fifteenth-century Joseon dynasty Ahn Gyon created superb landscapes with the ink brushes of his period on paper (for example, Mongyu dowondo; Dream Journey to the Peach Blossom Land), contemporary artists like Lee Lee-Nam produce artworks using the media of our times that reflect today’s technology and how we approach life today. In no way does this mean that the traditions and subjects of the old masters have been lost. On the contrary: they are revisited, interpreted anew, and reconfigured using the media of today. Progress in art emerges from readdressing traditions and the breaks with these traditions. And in all ages the then new contemporary technology was used to this end, for instance, printing, photography, electronics, and so on, which expanded the particular generation of artists’ creative scope. This applies especially to digital technology, which for decades now has been changing the world.
With the rapid technological and social transformation of our world in the course of globalization, the very core of theories and practices in the arts is being reassessed, and traditional standards are being called into question. This interrogation from the ground up has become necessary because of the rise of digital tools and transmission media that have fundamentally altered the conditions of production and distribution in the arts. Media artworks created in the last five decades elude any hasty classification according to well-known genre concepts. Apart from the use of new materials in art, which began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in parallel with advances in artistic techniques, the rise of digital art especially since the 1960s has led to new concepts of artistic authorship and to new ways in which visitors/users engage with artworks and intervene in how they are perceived.
Public space has now been extended outwards from the enclosed rooms of public buildings to encompass outdoor urban areas and, via the media channels of radio and television, also the global information space, where today all information can potentially be in all places at all times. Along with the high expectations fueled by a society increasingly shaped by the cult of the event, the continual evolution of the methods of artistic production confronts museums and collections, curators and conservators, with hitherto unimagined possibilities, coupled with unanticipated curatorial challenges.
Some decades ago the seemingly auspicious term “new media” was associated with far-reaching technological and social visions aimed at both the individualization as well as the globalization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It was envisaged that it would be possible for individuals to connect in real time from any location on the globe to any other individual on the planet. The totality of global information would be freely accessible for everyone at any place in the world. Yet alongside the expectation that globally networked communications and understanding would have uniquely positive outcomes, later reduced to and summarized in the marketing buzzword “the information superhighway,” even in the 1960s the potential danger of an inherent totalitarian tendency was recognized and clear-sightedly described.
It goes without saying that Lee Lee-Nam, who once referred to himself “a new media artist”, engages with these changes in our societies. In his personal notes he concludes that “We live in an age of darkness bereft of harmony where everything has become increasingly polarized and divided.” His artistic work, he continues, “aims to find the missing balance and explores the possibility of bridging the gap between mind (i.e., analog) and matter (i.e., digital).”
If one looks at the rich and diverse spectrum of Lee Lee-Nam’s oeuvre, it is immediately apparent that his subjects invariably come from the repertoire of well-known old master paintings, both Asian and European. He chooses works that have featured in the international historiography of art for generations and are held in the world’s most important art museums — paintings and sculptures that have long been a part of our collective cultural memory, not only in Europe, but also in Asia. In this process of the globalization of art, its digitization and fast dissemination via electronic networks plays a decisive role.
In his video works Lee Lee-Nam performs the miracle of setting static painted figures and things in motion through digital image processing. These are not optical illusions, but a complete digital recreation and reanimation in the realm of moving pixels, which gives rise to perplexing simulacra of the original works on high definition video monitors. In a creative act that is almost magical, the artist gives back life and movement to the originals, and in this way brings them once more to our attention. By giving full rein to his imagination and not being afraid of any defamiliarization, Lee Lee-Nam invests these sacred cows of art historiography and popular literature’s uncritically revered art icons with a distinct touch of irony.
How about using the latest digital technology to develop Leonardo Da Vinci’s Mona Lisa (ca. 1503), universally admired for her enigmatic smile? Untold artists have commented on this masterpiece in countless imitations in every kind of material and using every kind of technique. Before the eyes of amazed viewers, in Lee Lee-Nam’s video work a slim La Gioconda puts on so much weight that she threatens to burst the frame, and thus she needs a new title: Obesity Mona Lisa (2009, 55 inch LED TV, 129 × 77 × 10 cm). Or what if the subject of Jan Vermeer’s most popular painting Girl with a Pearl Earring (ca. 1665, Mauritshuis Den Haag) had a common housefly crawling up her cheek? After all, since Peter Webber’s film Girl with a Pearl Earring (2003) the seventeen-year-old housemaid Griet from Delft is a pop icon of unconsummated desire. Lee Lee-Nam’s video bears the ironic title Fly with Pearl Earring (2012, 55 inch LED TV, 129 × 77 × 10 cm).
Fig. 1. Obesity Mona Lisa, 2009 (Video, 55 inch LED TV, 129 x 77 x 10 cm)
Fig. 2. Fly with Pearl Earring, 2012 (Video, 55 inch LED TV, 129 x 77 x 10 cm)
Lee Lee-Nam’s subtle humor is also in evidence in playfully faked self-portrait of 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with Pipe, which is based on a real self-portrait (Saint-Remy, September 1898) that is today in the Musée d’Orsay, and which depicts the artist, hatless, wearing an unbuttoned coat in front of a swirling blue background. In Lee Lee-Nam’s video work van Gogh is shown left-right reversed and holding a pipe. After puffing briefly on the pipe, tobacco smoke drifts upwards, past the artist’s forehead and face with its austere expression, where it slowly disperses, and — like the thought bubble floating above his head — reveals van Gogh’s source of inspiration for his painting The Lunch Break: the sleepers in the eponymous painting by the French painter Jean-François Millet.
In another work by Lee Lee-Nam Van Gogh is visited by a Korean painter colleague who asks him why he cut off his ear. Eventually, the two artists exchange paintings. Van Gogh hangs up the ink drawings in his room, and the Korean artist returns home to his country on horseback carrying Van Gogh’s self-portrait. In the same way that many elements in Lee Lee-Nam’s works assume a life of their own (fish, butterflies, etc.), and move freely from one discrete monitor to the next, cultural exchanges take place across all borders and epochs. This dissolution of cultural barriers and temporal constraints can be regarded as a leitmotif of Lee Lee-Nam’s work.
Animation is clearly not a mystery to Lee Lee-Nam; he analyzes it through the very act of animating, and subsequently presents it to his viewers. To do so he operates with the principle of electio (from Latin election; English selection): the deliberate choice of the most beautiful and best motifs from classical art’s repertoire. This strategy has been cultivated throughout art history since antiquity, especially in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y France, for instance, by Nicolas Poussin. In the traditional view this repertoire, the selection of the most beautiful and best motifs, enhances critical abilities, and should tutor future artistic practice.
There is no question that with his reworking of famous classical masterpieces Lee Lee-Nam does not create copies but new, autonomous works. He uses the originals as select material, which through subtle and sometimes radical defamiliarization seek as simulacra to question our habits of seeing and dealing with art. With the deliberate appropriation, with the ingenious use and disconcerting defamiliarization of his selected objects as well as their expansion, Lee Lee-Nam operates as a typical proponent of post-modernism; in his choice of technology and medium he proves himself to be a prototypical contemporary artist, who understands the present, and who interrogates the changing reception of art in the East and the West. That he includes us, the viewers, in this confusing game of defamiliarizing well-known objects, is part of his artistic concept.
So is it blasphemy or esteem when Lee Lee-Nam appropriates classic artworks of famous artists and expands and defamiliarizes them with his digital games? I would argue in favor of highest esteem in the sense of electio (selection), which artists throughout the ages have elected to practise, in competition with the originals that is marked by respect, to comment on and question what other masters before them have created. For Lee Lee-Nam it is about appreciation, about updating, and about the contemporary readability of historical works with universally valid themes. In this sense Lee Lee-Nam’s works are media art, and not because of their technical characteristics: they analyze the changing reception of painting and sculpture, of art in general in the light of the new media.
Lee Lee-Nam’s strategy of using technological media to “leave the flat canvas and pass over into three-dimensional space”, and thus transcend the limits set by traditional sculpture, derives from his desire “to give back their light to the pictures, which have lost it by being stored and exhibited for decades, even centuries, in museums” (interview with Lee Lee-Nam). In view of the complexity of his oeuvre, it is inadequate and a reduction to classify Lee Lee-Nam simply as a “media artist.” Lee Lee-Nam works with all materials and means of artistic expression — drawing, painting, sculpture, installation, clay, and pixels — and uses the special properties of each to transcend the constraints of purely digital media production as well.
For him, technological media are not an end in themselves, but means and tools which he and the collaborators in his studio use to enter into intense communication with the viewers of his works. Lee Lee-Nam’s repeatedly professed goal, “to give back the light to the works,” can be taken metaphorically as well as understood as a direct reference to the technology used. For his works do “shed a new light” on the old masterpieces, in both senses of the expression, not only because they make their colors glow with the new light of LEDs on the latest LED screens.
Lee Lee-Nam’s engagement with the thematics of light is also signalled by the titles of his most recent works, created in 2014, which even include a video installation titled The Birth of Light (7 min 40 sec, 688.4 × 15.3 × 130.5cm). On eight glowing LED screens he presented well-known motifs taken from works by the French Baroque painter Georges de La Tour (1593–1652), in which a simple wax candle is the only source of illumination in his nocturnal religious paintings. In Lee Lee-Nam’s digital reenactment La Tour’s mysterious figures are frequently depicted left-right reversed in the flickering, animated candle light on the LED monitors. In one scene Lee Lee-Nam adds flashing stars of colorful fireworks. The birth of light stands here for the rebirth of art “in an age of darkness”, as do three other works of 2014: Born again Light, Language of Light, and Reborn Light.
Fig. 3. Born again Light, 2014 (ink drawing)
Fig. 4. Born again Light, 2014 (installation 340 x 90 x 140 cm, fiberglass, motor, LED light)
For the installation Born again Light (340 × 90 × 140 cm, fiberglass, motor, LED light) Lee Lee-Nam chose Michelangelo’s famous Pietà (1498/99) as his source material. This early work by the 23-year-old artist, today in St. Peter’s Basilica in Rome, was even considered by his contemporaries to be an important work. Like the artworks mentioned above — Leonardo Da Vinci’s Mona Lisa, Jan Vermeer’s Girl with a Pearl Earring, and the self-portrait of Van Gogh — the Pietà is one of the most admired works of Western art and also very well known in Asia. The material that Michelangelo used, marble, is digitally transformed by Lee Lee-Nam into a shimmering white Plexiglass sculpture, the surface of which reproduces the purity and smoothness of the original excellently. However, in Lee Lee-Nam’s magnificent reenactment of the sculpture, the dead body of Christ has mysteriously detached itself from the encircling arms of the Mother of God and now floats about six feet above her head. The body, captured in its original lying position is skilfully illuminated by LED spotlights in such a way that it throws very different shadows on the walls. The shadow on the back wall corresponds with the form of the body in Michelangelo’s sculpture; on the left-hand side wall the shadow is of Christ as a child. Thus in Born again Light the rebirth of Christ is a metaphor of the rebirth of light “in an age of darkness”.
Fig. 6. Reborn Light, 2014 (installation, steel, glass, water, video, TV monitor)
Fig. 7. Reborn Light, 2014 (ink drawing)
Fig. 8. Reborn Light, 2014 (installation, steel, glass, water, video, TV monitor)
In his work Reborn Light (2014) (installation, steel, glass, water, video, TV monitor) Lee Lee-Nam also uses the metaphor of the rebirth of light. Viewers stand in front of a right-angled stainless steel structure with a central section made of glass two-thirds full of water. Above the surface of the water hangs a TV monitor on steel cables on which appears the image of a white dove, filmed in slow motion, slowly beating its wings against a dark background. A mechanism, which is not visible to the viewer but whose electric motor hums loudly, gradually lowers the TV into the water and then raises it again, to the sound of lapping water and illuminated by a blue light. This work also employs extra LED lighting on the underside of the TV. When the monitor is raised the water dripping down produces waves that are mysteriously reflected on the walls of the darkened room.
Fig. 5. Language of Light, 2014
(installation, 600 x 220 x 300 cm, fiber-reinforced plastic, video, TV monitor, video projector)
In his large-dimension installation Language of Light, 2014, (600 × 220 × 300 cm, fiber-reinforced plastic, video, TV monitor, video projector) Lee Lee-Nam uses the world-famous sculpture of the Venus de Milo (ca. 100 BCE) which is in the Louvre in Paris. Multiple copies are made of the torso of the marble original in white Plexiglass and these thirteen figures, together with copies of the lower half of the Venus, are arranged in a tight group. In the exhibition room the figures stand with their faces to the wall, so that viewers can only see them from the back. For Lee Lee-Nam “the Venus sculptures represent mankind bereft of light.” In the darkened room with a black floor the tightly knit group of sculptures serve as a gleaming projection screen. On their backs Chinese characters appear that form the proverb “to fall into one’s own snare”. In the course of the video the characters, which were painted with black ink, dissolve from the bottom upwards as though they had been immersed in water. Then different characters appear on the sculptures’ backs which mean “a light upon every soul.” In the foreground of the installation an older TV set stands at one side, and characters appear on the screen which mean “Who am I?” Here, too, the characters dissolve, leaving the white screen blank. In Lee Lee-Nam’s view, the light of awareness that comes from outside turns people back to the real question: Who are we? It is exactly in this sense — as the source of inspiration for a new awareness — that Lee Lee-Nam wants his work to be understood.
The people of the city of Gwangju have vivid memories of the repression of pro-democracy movements, when during the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in a popular uprising in Gwangju in May 1980 hundreds of students and civilians were brutally killed. Since those times, especially with regard to culture, the city of Gwangju and its Chosun University have become important centers for democratic cultural change.
When, in 1826, the French scientist Nicéphore Niepce took the very first photograph, he called his invention héliographie, writing of the sun. Although he had invented a radically new technology, Niepce was not concerned with experiments on sensory perception or with the cultural importance of his invention, but simply with the discovery of the photochemical action of silver bromide and with the pressing problem of fixing his volatile images. In his book of 1844, The Pencil of Nature, one of Niepce’s famous followers, the Englishman Henry Fox Talbot, maintained a distinction between the heliographic technique and art when he wrote in the Introductory Remarks that the plates in his book were “wholly executed by the new art of Photogenic Drawing, without any aid whatever from the artist’s pencil. [...] obtained by the mere action of Light upon sensitive paper.” In 1839 this new technology was first referred to as photography, light writing. But already by 1859, when French poet Lamartine wrote “we will no longer say it’s a profession, it’s an art”, the enormous potential of photography for culture and sensory perception had been fully recognized. It was as though this new medium of fixed images en masse could extend our senses and thus authenticate our short existence in a rapidly changing world; since then photography has become the focus of the furious modernist desire for images that represent the visual world. With its documentary properties, it seemed to enlarge both time and space and thus conserve and convey the true memory of history. At its origins, photography’s mission was to elaborate a new planetary consciousness, serving the memory and truth of the world and its cultures.
The self-image of our societies has, for example, been influenced for thousands of years by stable systems for handing down customs and traditions — systems that are geared toward longevity. In his studies of ancient Egyptian culture, the Egyptologist and scholar of religion and culture Jan Assmann has demonstrated convincingly that “the tradition within us, […] which has solidified over generations, through centuries, even millennia of repeated texts, images and rites, […] shapes our consciousness of time and history, our image of ourselves and of the world.” Jan Assmann, “Das kulturelle Gedächtnis,” in Thomas Mann und Ägypten: Mythos und Monotheismus in den Josephsromanen (Munich: C.H. Beck, 2006), 70. Crucial to this conclusion is the argument that “cultural memory” (a term coined by Assmann) has in all civilizations thus far been oriented toward longevity and reliability, in particular in response to the constant threat of outside influences, wars, deliberate destruction, natural disasters, and natural processes of decay.
In all epochs, and in all societies, cultural developments are closely intertwined with economic, political, and social conditions, which both determine and result from them. Hence, we must include a consideration that goes beyond the accustomed horizons of political, conservatorial, or stylistic evaluations of a collection. It is only against this broader horizon, which questions in very general terms to what extent culture is dependent on economics, that phenomena can be understood which, upon closer inspection, can all too easily be ascribed to the imperfection of individual technologies or the failure of individual institutions.
“He [meaning the interpreter] participates freely in the reinvention of the work.” Umberto Eco, The Open Artwork (Frankfurt am Main, 1977), 32; Italian original Opera Aperta (Milan, 1962). This statement can be applied to the consumer or user of media art as well.
The term “global village” was coined in 1962 by Marshall McLuhan in his famous book The Gutenberg Galaxy.
In his important book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 (1964, New York: McGraw-Hill) (Cambridge, MA: MIT Press 1994, p. 3.) Marshall McLuhan already recognized the totalitarian character of the upcoming global network: “Today, after more than a century of electric technology, we have extended our central nervous system in a global embrace, abolishing both space and time as far as our planet is concerned.”
La Terra ibrida
Yun Cheagab(Direttore, HOW Art Museum)
Quando ho vistoquesta opera per la prima volta, le parole chesubito mi sonovenute in mentesono state “La Terra ibrida”. L'artistachiaramente mi disseunaltrotitoloriguardo la sua opera, ma avevogiàdecisonellamiatesta di chiamarlo “La Terra ibrida”. Si tratta di unasorta di soprannome.Miricordocertamente di averloletto in unlibro. Era probabilmente in unlavoro di Ivan Illich. Ma quandosonotornato a casa e ho cercato molto su Internet, non ho trovatonessunaparola.
L'umanità di oggi vive e prosperaall'internodelcapitalismopiùdegeneratonellastoria. La tecnologiadigitalechetrascendeil tempo e lo spazio, rendendopossibileil networking, ha legato la Terra in una sola comunità e stafondendoilmondointero in un unicomercato. Ognisferadellavita èincorporata con la logica del mercato, e ognisensodella vita è statoridotto a un valoremonetario. I valoripubblicichevoiediopossiamocondivideresenzacombatterestanno diminuendo ognigiorno, irapportisonosempreguidati da contratti, e la considerazionedeglialtrisiriduce a un servizio.
Come afferma Paul Gilding, senza quasi renderseneconto, “la terra è piena di noiesseriumani, piena di roba nostra, piena di nostririfiuti, e piena di nostridesideri”. Come l'agoniadeldoloreprovato dal poeta Park No-hae, in “questariccaepoca di povertà”, un latodellacittàstamorendo a causa dellamalnutrizione e l'altrolato ha ilcestinotraboccante di rifiuti. La mancanza di distribuzione ha dato vita a unaricchezzadistruttiva. La nostra vita media di oggi è collegata a questiproblemimondialisenzaessereconsapevolidellaglobalizzazione. Questo è l’oscurolatonegativocreato dal matrimoniotradigitale e neoliberismoche continua a crescere e riprodursi.
Pensocheilsoprannome “La Terra ibrida” che ho adottato per l’opera di Lee Lee Nam non ne siaestraneo. ilsuolavorovaoltrel’incrociofratradizione e modernità, umano e natura, est e ovest, analogico e digitale, neoliberismo e tecnologiadigitale, ed è sull’orlo di questomondoibrido. Si tratta di unlavorointrospettivosulla vita che non devemaiessereridotta al capitale e allatecnologia. È la realtàopposta in cui la resistenza e la fugadelgenereumanohannoinizio. E’ un'esperienzascomoda e dolorosa cheriflettesulleinefficienze del mercato e sull'irrazionalitàumana. “La Terra ibrida” è per me analgesico e stimolanteallostesso tempo. Questo è probabilmenteilmotivo per cui mi piaceparticolarmentequestolavorofratutte le sue opere.
이향준
다음으로 지각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갖는 동적인 성격이다. 원래의 그림은 종이 위에 그려져 고정적일 뿐만 아니라 분할 불가능한 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디지털 시스템에 의해 재처리된 것이다. 정보를 기본적인 단위로 분할할 수 있는 디지털의 특성상 불연속성은 재조정 과정을 통해 복제와 변형을 가능하게 만든다. 정지했던 새의 이미지는 공간을 이동해서 불연속적으로 배치되지만, 그것은 프레임의 연결을 통해 우리의 시각에 동적인 속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래의 정보 속에 전혀 다른 맥락으로부터 기인하는 정보를 삽입할 수도 있다. 동양화의 한 복판을 위 아래로 가로질러 날아가는 비행기의 이미지가 삽입될 수 있는 것도, 기하학적인 선들이 횡단할 수 있는 것도, 심지어 동양화의 이미지 속에 전혀 문화적 맥락이 다른 인물과 동작들이 병치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매체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이미지는 문화적 차이를 갖지만, 정보는 등질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디지털 시각 매체를 다루는 창작자의 표현의 한계는 사실상 그의 상상력의 한계인 것이다.
이처럼 개념적 은유를 통한 혼성과 디지털은 굉장한 근친성을 갖는다. 디지털은 혼성을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기에 편리하고, 혼성은 디지털에 의해 거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보장받는다. 남는 것은 무엇과 무엇의 혼성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 동양의 고전 회화 전통은 어떻게 해서 이이남의 작품 속에서 새로운 예술소(藝術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는가?
3.
디스플레이가 종이라면 「TV 는 액자」이고, 「영상은 그림」이다. 이러한 연관된 개념적 은유가 사람들에게 손쉽게 받아들여지는 인지적 이유가 있다. 영상 자체는 정지 이미지의 연속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림은 하나의 정지 이미지이다. 따라서 영상은 그 자체로 정지 이미지의 축적이다. 이런 유사성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영상은 그림」은유도 사람들의 두뇌에서 활성화되는 데는 인지적 어려움이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이남의 작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효과를 가져 온다. 하나는 강력한 보편성이다. 동양의 회화 전통에 약간이라도 이해가 있는 사람은 이이남의 작품이 그것의 현대적 재현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한다. 이이남의 작품이 여타의 아방가르드적인 미디어아트와 달리 난해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익숙한 것의 차용(借用) 혹은 혼성 때문이다.
이 혼성은 이이남의 작품에 두 가지 대비되는 속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게슈탈트적인 두 가지가 충돌하면서 공존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동양 회화의 시각적 재현은 그의 작품에 일종의 원전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차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전(original)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그 작품의 원전 속에 담긴 것이 똑같이 이이남의 작품 속에도 담겼을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추측하게 된다. 즉, 감상자는 일차적으로 이미지에 집중하게 되고, 이렇게 할 때 그는 아주 오래되고 권위 있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익숙한 어떤 문화적 전통과 대면하고 있다고 여긴다. 누구든지 아주 오래된 전통이 현대적 양식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그의 작업은 방식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내용의 핵심적 함축이 알려진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그 매체적 특징은 배후로 소실되고 나타나지 않는다. 디스플레이 자체의 매체적 특징이 지각되는 것은 이미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볼 경우다. 이미지는 낡은 것이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은 새 것이다. 부분적으로 낡고 부분적으로 새로운 것, 낡은 내용의 새로운 형식을 통한 재현.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러한 양식의 서구적 표현이라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양적인 표제어다. 즉, 이이남의 작품은 아주 낡았으면서도 새롭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혼성은 이미 고전적인 사례들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 건축에서 차경(借景)의 원리나, 시가 문학에서 차운(借韻)의 전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더욱 극적인 사례로는 저명한 시구들을 선(禪)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비유로 차용하는 경우도 거론할 수 있다. 차경의 경우는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자연의 광경을 보고 즐기는 풍경이라는 차원으로 의미를 전이시킨다. 차운은 이미 존재하는 시구의 운자(韻字)에 해당하는 특정 부분을 빌려 자신의 시어 속에 녹여냄으로써 형식의 반복과 내용의 차이를 즐기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선종의 선사들은 당대의 저명한 시구들을 곧잘 선의 경지에 대한 묘사로 애용하곤 했다.
예를 들어 법연(法演)이 인용한 것으로 알려진 통속적인 연애시 가운데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소옥아! 소옥아!” 불러도 시킬 일은 없지만 頻呼小玉元無事
다만 사랑하는 낭군에게 목소리 듣게 하려고 祗要檀郞認識聲
이 구절은 남편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일도 없으면서 몸종인 ‘소옥’의 이름을 부르는 부인의 수줍은 애정을 노래한 것이다. 문학적 독창성은 부인이 직접적으로 남편을 부르지 않고,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종의 이름을 부른다는 간접화법에 담겨있다. 선종의 선사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적인 깨달음의 속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수행자는 그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도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다른 이름을 부르지만 그것마저도 그것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다. 소옥을 부르는 부인이 수동적으로 남편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선의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을 다하고도 깨달음의 순간이 자기에게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개념적 은유를 빌려 말하자면 「선의 수행은 사랑」이고, 「깨달음이란 사랑하는 이의 돌아봄」인 것이다.
차경과 차운, 연애시에 대한 선종의 재해석은 모두 다 동일한 것을 공유한다. 아날로그적인 연속성을 갖는 자연은 창문이란 프레임을 통해 재해석되고, 동일한 운은 다른 시정(詩情)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론적 맥락을 획득하며, 연애시는 선의 깨달음이 가지는 수동성에 대한 은유가 된다. 하나의 대상이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이처럼 다양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이다. 이이남은 그것을 평판 디스플레이라는 매체를 통해 동양 회화 전통을 차용해서 구체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4.
하지만 이러한 작업의 특성은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이이남의 혼성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어서 이해하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같은 이유 때문에 모방하기도 쉽다. 동양 회화의 전통은 그 자체로 풍부한 텍스트를 제공한다. 하지만, 동양에는 이외에도 차용 가능성이 풍부한 수많은 다른 전통들이 존재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구양순(歐陽詢)와 안진경(顔眞卿) 왕희지(王羲之)로 대표되는 서예 전통은 어떤가? 우리는 동양의 문화에서 서예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인 장르일 뿐만 아니라, 회화와 서예가 얼마나의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제 추사(秋史)의 「부작란(不作蘭)」을 이이남과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려는 임의의 예술가를 상상해보자.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이남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부작란」에 포함된 많은 구절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배경과 글자의 색깔이 수시로 변한다. 난의 이미지는 여전히 이이남의 것과 유사하게 흔들거릴 것이다. 그의 작품은 ‘난초를 안 그린지 스무 해, 우연히 참된 성품 그려내었네[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와 같은 문자의 변화를 제외하면 이이남의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상상의 예술가는 자신이 이이남이 주목하지 못한 부분에 주목했다고 할 것이다. 동양의 서예 전통을 자신의 미디어아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이남이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이이남의 기존 작품에서는 이러한 타이포그라피에 대한 주목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즉, 이이남은 시각적 이미지의 중요한 오브제로 서예의 가능성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디 서예뿐이겠는가? 불교의 수많은 시각적 만다라와 탱화 전통, 도가 사상의 수많은 신화적 이미지들 역시 이이남과 유사한 작업에서 중요한 혼성의 오브제들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워홀(A. Warhol)과 리히텐슈타인(R. Lichtenstein)의 일화를 통해 간단하게 유추할 수 있다. 즉, 워홀은 만화를 소재로 삼으려고 했던 자신의 팝아트에 대한 구상을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보고 난 후 철회했다. 그리고 그는 브릴로 상자를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화와 브릴로 상자의 차이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의 차이를 만들었다. 익숙한 혼성의 결과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선 그것은 진부한 것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을뿐더러, 남들도 나와 비슷하지만 차별화되는 양상으로 진척시킬 수가 있다. 키취를 받아들였던 팝 아티스트에게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를 주장하려는 아티스트라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그의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이남에게 근본적인 질문 한 가지를 환기시킨다. 즉, 그는 어떤 종류의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5.
이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이이남이 다루는 매체 자체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다루는 매체는 평면 디스플레이인데, 그것의 상투적인 이름은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상품 가운데 하나인 TV다. 이것은 곧 이이남의 개념적 통합 작업이 대중매체로서의 TV와 동양 전통 회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화폭으로서의 TV가 거의 모든 가정에 구비되어 있는 대중매체이자 기성품이라는 점이다. 그가 이 매체를 택함으로써 마주치는 것은 약간 이상한 상황이다. 매체 혹은 화선지로서의 TV는 이미 거의 모든 가정에 구비되어 있다. 그런데, 그 TV들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예술의 내용은 어디에 있는가? 만연한 화폭과 부재하는 내용이라는 이러한 특징은 TV가 엄연히 하나의 대량생산 제품이라는 상업적 성격과 결부될 때 보다 첨예한 갈등을 드러낸다.
비록 리히텐슈타인이 싸구려 만화를 자신의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박영욱은 그의 작업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만화에서 뽑은 장면을 스케치하고, 그것을 실물 투영기로 확대해 캔버스에 전사시킨다. 그다음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스텐실, 채색, 윤곽선 등을 사용하여 캔버스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리히텐슈타인은 소재를 만화에서 따왔을 뿐, 그의 작업은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이남의 작업은 전자적 작업과 수작업의 혼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리히텐슈타인과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의 매체가 캔버스가 아니라, TV라는 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포한다. 즉, 하나 밖에 없는 TV를 만들어 기성품을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킬 것인가? 아니면 모든 TV에 적용가능한 보편적 예술 형식을 확립할 것인가? 전자에 기울면 아방가르드적이 된다. 반면에 후자에 기울면 팩토리를 운영했던 워홀의 확장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팝 아티스트들을 여전히 동요시키고 있는 아티스트와 비즈니스맨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은 이이남의 작업에서 여전히 문제될 소지가 있다.
6.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이남의 이번 전시가 가지는 다양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개념적 통합은 평판 디스플레이와 동양 회화 전통의 혼성이라는 차원을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진행되는 수많은 종류의 혼성을 권장한다. 니체(F. Nietzsche)는 이와 유사한 통찰을 이렇게 표현했다. “천재는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이며 머리에는 천사의 날개까지 달고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이남은 동양의 저명한 회화 전통이라는 천사의 날개와 평판 디스플레이라는 사람의 몸통을 결합하고 있다. 니체는 여기에 아직도 혼성되어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아 있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혼성은 네 발 짐승의 하체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실제로 이이남이 이 혼성의 경계를 더욱 확장시키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수의 작품들이 있다.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의 이름이 대변하는 예술 세계는 동양 회화 전통의 원래 외양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는 것들에 단단히 묶여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상승하는 날개로 은유되는 동양의 회화 전통과 같은 아름다움의 세계가 아니라, 땅에 얽매인 짐승의 네 발과 같은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마저도 자신의 혼성 대상으로 포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추함이 아직 그의 혼성 목록에 올라있지 않다면 그는 매체의 새로움과 작업 방식의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직도 추함의 수용에서 머뭇거리는 근대와 현대의 경계 사이에 애매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이남의 기존 작업으로부터 예상 가능한 혼성 작업을 상상하면 새로운 가능성에의 탐색을 몇 가지로 구체화 할 수 있다. 동양 회화 전통은 일종의 리얼리즘에 해당하는 형사론(形似論)과 표현주의에 해당하는 전신론(傳神論)의 이항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혁(謝赫)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운생동(氣韻生動)은 전신론에, 응물상형(應物象形)은 형사론의 표어에 해당할 것이다. 이이남의 기존 작업이 이 가운데 하나를 극단적으로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전신론에 대응하는 동양화의 가장 고도화된 형태로서 득의망상(得意忘象)의 경지를 염두에 둔 숭고화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재발견했던 생명의 숨결(souffles vitaux)―들뢰즈(G. Deleuze)가 차용하는 이 개념은 놀랍게도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표현 속에 나오는 기(氣)의 번역어이다―이 골격을 이루고, 붓의 필치가 빚어내는 우주의 선(ligne d'univers)들이 교차한다는 동양화의 정신성을 고도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선종의 대가들이 연애시를 선의 메타포로 고양시키는 것과 유사한 작업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TV-선(禪)’의 경지를 추구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이남의 기존 작품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 방향에는 이런 숭고화 경향이 의외로 강한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네 발 짐승의 하반신으로 대변되는 추함의 경계 너머로 혼성을 감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현대 예술의 자기 비평을 나름대로 발전시킨 메타 비평적 작업들이 포함될 것이다. 20세기 미술사의 유명한 스캔들 가운데 하나인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의 「예술가의 똥Merde d'Artiste」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질문의 의미는 자명하다. 자신의 똥을 밀봉한 90개의 깡통을 제작한 후 거기에 예술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이런 행위는, 예술을 자본주의 시대의 배설물로 언급하는 철저한 자기 비평의 정신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이남의 작업이 이러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까?
「뒤샹의 방」에서 이이남은 변기에 소변을 보는 뒤샹(M. Duchamp)의 모형물과, 별도로 전시된 변기의 내부에 포함된 디스플레이가 소변보는 장면을 재생하는 작품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이남은 뒤샹을 소환하고, 오웰(G. Orwell)을 환기시킨다. 뒤샹을 자신이 다루는 매체와 결부시킴으로써, 이이남은 사실 오웰이 상상했던 디스토피아에서 매체가 차지하는 역할을 회의하면서, 비데오라는 매체의 표면과 이면이 갖는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탐구했던 백남준(白南準)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이남이 기존에 확립된 자신의 예술적 관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렇다면 이이남은 이러한 자기 비평적인 현대 예술의 메타적 성격에 철저한 아방가르드적 아티스트를 꿈꾸는 것일까?
마지막 방식은 자신의 작업을 직접 사회적 현실과 대면시키는 것이다. 이이남의 이번 전시가 5.18을 언급하는 작품들이나, 남도의 풍경을 포함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기존의 이이남의 작업이 가지는 특성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회적 발언을 하는 작품들과 예술적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그것은 설령 차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새로이 구축되어야 할 미지의 실험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이남에게 최소한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통로가 열려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이미 그의 작업에 잠복해 있고, 어떤 것은 이번 전시를 통해 언급하기 시작되었다. 이 시도들은 기존의 자신의 작업에 대해 비평적 관점을 제기하고, 그것의 한계와 가능성의 폭을 측량하고자 하는 예술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이 외에도 아날로그에 안녕을 고하고, 디지털의 예술 경험을 소개한다는 측면에서 이번 전시가 갖는 다양성들 속에는 아날로그적 경험의 추억과 새롭게 대두되거나 가까운 미래에 경험될 디지털적 시각 경험의 특징들이 다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러 백남준의 과거 작품들과 유사하게 설치된 브라운관 TV의 탑들, 플랙시블 평판 디스플레이의 확장이 가져다 줄 스크린 벽의 시각 경험을 보여주는 벽 전체에 투사되는 새들의 자유로운 움직임, 자동차의 전면이나 심지어 측면 유리에도 탈부착이 가능하게 될 투명 디스플레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품 등등이 그것이다.
7.
결론적으로 커다란 두 개의 축이 이이남의 전시를 관통하고 있다. 하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시대에 자신이 다루는 매체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시각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다. 두 번째는 이이남이 자신이 확립한 기존의 관행을 부분적으로 제약하고, 그 작업의 한계를 일신하려는 탐색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한계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의 이이남을 형성한 그 독창성의 새로운 전형을 확보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예술가는 어쨌든 그렇게 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유행하는 대중가요의 가사가 예언한 것처럼 “시간이 모든 걸 대답해 줄 것이다.”
살아있는 그림(les peintures vivantes)
류병학(미술평론가)
세인들은 그를 ‘제2의 백남준’이라 부른다.
그는 컨버전스 분야 세계 석학인 존 라이크만(John Rajchman)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로부터 극찬을 받아 화제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모션 포스터를 제작하여 세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삼성전자와 5년 동안 콘텐츠 제공 전속계약을 맺고 55인치와 46인치 LED TV에 자신의 작품 3점을 내장하여 출시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작년 G20 서울정상회담 때 주요 회의장과 각국 정상이 머무는 호텔 숙소에 비치된 TV와 아이패드, 갤럭시탭 등을 통해 작품을 설치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작년 말부터 애플 앱스토어에서 유료로 서비스되고 있다. 그는 최근 영국의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과 함께 《동화책 속 세계여행》전을 개최했다. 그의 작품들은 올해 발행된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전 세계 미술작가 500명의 작품 가격을 순위별로 기록한 ‘아트 프라이스’에 그는 363위를 차지했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광주 토박이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이다. 그의 작품은 여타의 미디어 아티스트 작품과 달리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와이? 왜 그의 미디어 아트가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는 대중의 코드와 동양/서양의 코드를 읽어내는 ‘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의 코드와 동양/서양의 코드란 대중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동양/서양의 명화를 차용한다는 것에 국한되기보다 그 동양/서양의 명화에 대한 현실인식을 관통한 탁월한 분석력을 뜻한다.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 구체적인 작품을 사례로 들어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필자가 그의 일명 ‘디지털-명화’를 언급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디지털-명화가 태동하게 된 초기 작업을 살펴보아야만 할 것 같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광주 조선대와 동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그는 졸업 후 조각 작품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과 전국조각가협회 특별상도 받았다. 그런 조각가 이이남을 미디어 아티스트로 전이시킨 ‘사건’은 무엇일까? 그가 1997년 순천대 애니메이션학과에서 미술해부학 강의를 맡았을 때, 학생들이 찰흙으로 스톱 애니메이션 작업하는 것을 보고 ‘움직이는 조각’에 삘이 꽂힌다. 그는 곧 17인치짜리 작은 모니터를 구입해, 그의 전공인 조각을 살려 클레이 스톱 애니메이션, 즉 ‘움직이는 조각’ 영상을 만든다.
1998년 제작된 이이남의 클레이 아트 애니메이션 <4학년>은 플라스틱에 담겨있던 찰흙 덩어리로 당시 순천대 애니메이션학과 4학년 학생들을 모델로 삼아 제작된 작업이다. 찰흙 덩어리로 만들어진 남학생은 다시 찰흙 덩어리로 돌아가 곧 여학생으로 변신한다. 물론 이이남은 찰흙 덩어리로 학생들 이외에 다양한 동물들(개, 고양이, 호랑이)들도 만들었다. 특히 호랑이가 자신의 꼬리를 잘라 먹는 장면을 보면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찰흙 스톱 애니메이션은 이이남의 작업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를테면 이이남은 찰흙 스톱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전의 ‘무거운’ 조각에서 해방되어) ‘가볍게’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벼움’은 우리 상식을 뒤집는 ‘유머 감각’을 뜻한다. 그 ‘가벼움’은 그의 디지털-명화에서 대중적 호응을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0년대 말 다양한 클레이 아트 애니메이션을 작업했던 이이남은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래픽 애니메이션 작업에 몰두한다. 그는 2002년 SK텔레콤 애니메이션 공모전에 <자살>을 출품하여 대상을 받는다. <자살>은 선비와 물고기의 자살법을 그린 것인데, 선비가 돌에 매달려 물속으로 들어가는 반면, 물고기는 풍선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간다. 너무나도 참을 수 없는 자살의 가벼움이 아닌가? <선악과>는 사과를 사이에 두고 하와와 뱀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던 ‘선악과’와 달리 이이남의 <선악과>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하와는 사과가 아닌 뱀을 잡아 먹으면서 관객에게 윙크하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무를 자르는 남자에 대한 나무의 복수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나무를 자르던 남자가 나무의 그늘에서 누워 잠잔다. 그런데 나무는 자신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나무를 자른 남자에게 복수한다. <THE ONE>은 사격표지판에 대한 엉뚱한 발상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총알에 맞은 표지판들은 모두 울상이다. 그런데 총알을 맞지 않은 표지판은 낄낄거린다. 왜냐하면 그 웃는 표지판은 날라오는 총알들을 모두 피했기 때문이다. 총알을 피할 수 없는 표지판이 총알을 피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발상은 이후 ‘그림의 떡’으로 알려진 명화를 움직이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게 한다.
이이남은 2004년에 오브제에 모니터를 접목시킨 다양한 작품을 제작한다. 〈밥 먹고 잠자라〉는 옛 교실 의자 위에 놓인 도시락의 뚫린 구멍으로 하늘의 구름이 떠가는 영상이 나오는 작품이다. 〈호주머니 속 풍경〉은 옷걸이에 걸린 자킷 호주머니 속에 모니터를 장착해 마치 호주머니 속에 동전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생명으로부터>는 고목에 모니터를 장착해 초록 꽃잎들이 흐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브제와 모니터의 접목 작업은 2005년까지 이어진다. 이이남의 <아이 러브 골프>는 골프장 영상과 (홀컵의 위치를 알려주는) 실제 깃발로 접목된 일종의 영상설치작업이다. 전시장 벽면에 골프를 치고 있는 골프장 영상이 투사된다. 그리고 그 골프장 영상 앞에 실재 깃발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라이트로 인해 그 깃발의 그림자가 영상에 겹쳐진다. 따라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마치 그 그림자-깃발을 향해 스윙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킨다.
이이남은 2005년 <실상과 허상> 시리즈 작품을 제작한다. 이이남은 '에스파냐의 카라바조'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의 <정물화(Bodegon)>(1636)에서 가운데 화병 2개 대신에 장미꽃과 유리잔을 교체시켜 놓았다. 그런데 유리잔을 보면 영상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그 영상은 어느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실상과 허상>을 보고 있는 관객은 유리잔 속에 담겨있는 관객과 다르지 않단 말인가? 그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관객은 작품 앞에서 단 5초도 서있지 않는다. 관객들은 전시장의 작품을 마치 지나가면서 보듯이 지나친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실상과 허상>은 마치 금욕적인 수르바란의 정물화처럼 관객에게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라고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전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이이남은 “제 작품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때 가슴이 쓰립니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알 수 없는 작품 앞에서 시간을 할애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우리가 축구경기를 즐기려면 최소한 축구 룰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객이 미술작품을 즐기고자 한다면 미술의 룰(미술사의 문맥)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일까?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가 "관객이 한 그림 앞에 최소한 5분만 서있었으면 좋겠다"고 원했다. 그러나 관객은 작품 앞에서 5분은 고사하고 5초도 서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이남은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니엘 아라스가 기대한 5분 동안 서있도록 하기위해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지나가는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이남은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 위해 우리들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디지털 기술에 주목한다.
이이남의 ‘명화는 살아있다!’
이이남은 2004년 이이남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명화의 재매개(remediation) 작품을 제작한다. <김홍도, 신-묵죽도>가 그것이다. 김홍도의 <묵죽도>는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그린 것이다. 김홍도는 대나무 줄기를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쳤다. 조선시대 대부분 ‘묵죽도’가 오른쪽으로 쳤다는 점을 참조한다면, 김홍도의 <묵죽도>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민환은 어디선가 김정희의 난초 화법을 빌려 대나무를 오른쪽으로 치는 것보다 왼쪽으로 치는 것이 몇 배 어려운 기술이라고 말하면서 왼쪽으로 순식간에 처내려간 김홍도의 <묵죽도>를 놀라운 기교를 과시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단원에게 대나무는 흔히 말하는 ‘군자’의 상징으로서의 고결한 대나무가 아니라 필치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소재일 뿐이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대나무 줄기의 필치를 보면 밑에서 위로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의 농담은 줄기 하단보다 상단이 진하다. 그렇다면 대나무는 바람에 대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자, 이제 이이남의 <신-묵죽도>를 보자. 오잉? 이이남의 <신-묵죽도> 대나무는 마치 ‘절개’를 비웃듯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당연히 움직일 수 없다고 확신한 그림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은 흔들리는 대나무 위로 눈이 내리는 것이다. 눈은 대나무 위에 서서히 쌓인다. 그리고 대나무 위의 쌓인 눈은 차츰 녹아 원래의 모습으로 컴백하는 것이 아닌가?
이이남의 <신-묵죽도>는 김홍도의 <묵죽도>를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한 것이다. 여기서 재매개는 기존 미디어(회화)를 디지털로 미디어화 시킨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이이남의 디지털 아트는 회화(명화)를 디지털로 재구현(Refashion)시킨 것이라고 말이다. 마치 절개를 지키듯 움직이지 않는 김홍도의 <묵죽도>는 디지털을 통해 마치 절개를 버린 듯 바람에 흔들린다. 이이남의 <신-묵죽도>를 보는 관객은 사색에 잠기기는커녕 오히려 놀란다. 그렇다! 관객은 이이남의 <신-묵죽도> 앞에서 4분을 즐긴다.
이이남의 재매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6년이다. 이이남의 대표작들 중 하나인 <8폭 병풍>도 2006년에 제작된다. 잔잔한 가야금 소리와 함께 소치 허련의 <홍매도>의 텍스트(제발)이 바람에 날리듯 의제 허백련의 <묵죽도> 화폭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나비를 전문적으로 그렸다고 하여 ‘남나비’로 불렸던 남계우의 <화접도>에 그려진 나비가 갑자기 날개 짓을 하더니 의제의 <산수화> 화폭으로 사뿐사뿐 날아간다. 도대체 ‘그림의 떡’인 나비가 어떻게 날개 짓을 하면서 날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8폭 병풍의 화폭이 화선지가 아니라 LCD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기 스위치를 켜면 병풍에서 가야금 소리가 나오고 나비가 날아다니고, 꽃잎과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일반 관객은 21세기 미디어 병풍 앞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런닝타임 5분 30초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즐긴다. 그렇다! 이이남은 다니엘 아라스가 일반 관객에게 기대했던 5분을 돌파한 것이다! 이것은 감상적 측면에서 보자면 혁명이 아닌가?
2006년 이이남은 동양과 서양의 심장이 멈춘 명화들에 전기 충격을 주어 살린다. 그렇다면 이이남이 사용하는 디지털 기술은 일종의 ‘심장전기충격기(defibrillator)’가 아닌가? 이이남은 ‘명화충격기’로 모네의 <수련>과 <해돋이, 인상>, 김홍도의 <황묘롱접도>, 김정희의 <세한도>, 신사임당의 <초충도>, 허백련의 <수묵>을 환생시킨다. 1874년 모네는 안개 낀 르아브르(Le Havre) 항의 일출 풍경을 그린 <해돋이, 인상(Impression, Sunrise)>을 ‘예술가 협회전’에 출품한다. 당시 풍경화의 대가로 알려진 조셉 뱅상이 모네의 그림을 보고 옆에 있던 샤리봐리 신문 미술부 기자 루이 르를와에게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루이 르를와는 “‘해돋이, 인상’이라고 합니다”고 답변했다. 조셉 뱅상 왈, “인상? 아이들의 색종이 쪽이 더 나을 것 같군요.” 루이 르를와 기자는 뱅상의 말을 빌려 ‘예술가 협회전’에 전시된 그림들에 대해 단지 인상만을 그렸다는 의미로 (모네의 그림 제목을 빌려) ’인상파 전람회‘라고 기사화 했던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프랑스 미술계 사람들 눈에는 모네의 <해돋이, 인상>이 미완성의 그림으로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모네는 막 떠오르는 해와 어선들 그리고 공장의 연기와 안개가 서로 어우러져 경계가 불분명한 순간의 느낌(인상)을 화폭에 담았다. 소설가 모파상 왈, “모네는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빛과 색의 조화를 다섯 개의 캔버스 위에 포착하는 포수였다.” 하지만 모네의 <해돋이, 인상>은 한 폭의 캔버스에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르아브르 항의 순간순간 변하는 빛과 색의 조화를 다섯 개의 캔버스 위에 포착한 포수는 다름아닌 이이남이다. 이이남의 <모네, 신-해돋이 인상>(2006)은 마치 모파상이 말한 것을 제시하듯 다섯 개의 캔버스가 아닌 하나의 모니터에 르아브르 항의 순간순간 변하는 빛과 색의 조화를 표현해 놓았다.
오만원권 지폐(뒷면) 도안에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가 사용되었다. 필자는 한국 근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으로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관념세계가 아닌 현실세계를 표현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이남의 <신사임당, 신-초충도>(2006)는 신사임당의 <초충도> 2점을 스캔 받아 제작한 영상작품이다. 수박 위를 날고 있는 나비를 박제시킨 신사임당의 나비 그림에 이이남은 생명을 주어 날개 짓을 하면서 가지가 그려진 그림으로 날아가게 한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가지 위에 그려놓은 나비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려진 수박으로 날도록 만든다. 이이남은 마치 하느님처럼 정지된 나비(그림), 즉 박제된 나비 이미지를 부활시킨다.
1990년대 말 컴맹으로 시작한 이이남은 2000년 중반 디지털 시대의 대표 아티스트가 되었다.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아날로그의 일루전을 디지털로 재매개한 디지털-일루전으로 재구현되었다. 이이남의 ‘디지털-명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2006년 흥미롭게도 숀 레비(Shaun Levy)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Night At The Museum)>가 개봉되었다. 물론 이이남은 디지털-명화를 2004년 <신묵죽도>에서 이미 시도했었지만 말이다. ‘박물관’ 하면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의 <상상의 박물관(Le Musee Imaginaire)>(1947)이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다. 앙드레 말로는 <침묵의 소리(The Voices of Silence)>(1953)에서 박물관을 미술의 신전으로 명명했다. 왜냐하면 박물관은 ‘아직’ 예술작품이 아니었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십자가’나 치마부에의 ‘마돈나’ 그리고 페이디아스의 ‘아테네 여신’ 등 유물을 예술작품으로 전이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물관이 모든 유물들을 예술작품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점에 앙드레 말로는 주목한다. 박물관은 박물관의 물리적 한계(크기) 때문이 아니라 건축물과 한 몸인 벽화나 모자이크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박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유물들은 박물관으로 운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 각국에 있는 모든 박물관을 방문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작품을 볼 수 없다.
앙드레 말로 왈, “오늘날 대학생은 대부분 컬러 사진 복제품인 훌륭한 작품들을 가질 수 있다. 그는 또 사진 복제품을 통해 인류의 많은 그림들, 오래된 고대의 예술들, 먼 옛날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인도와 중국의 조각 작품들, 일부 비잔틴 미술품, 로마의 벽화들, 원시적이고 대중적인 예술들을 만날 수 있다.”
앙드레 말로는 사진 복제품을 통해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작품을 볼 수 있음을 간파한다. 따라서 그에게 ‘도록’은 일종의 ‘벽 없는 박물관(Museum without Walls)’이 되는 셈이다. 앙드레 말로는 ‘벽 없는 미술관’을 ‘상상의 박물관’으로 명명했다. 왜냐하면 상상의 박물관은 죽은 유물에 생명력(상상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숀 레비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을 영화로 재매개한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명화 복제품을 통해 명화를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한 것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을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한 것이 아닌가? 숀 레비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마찬가지로 이이남의 디지털-명화 역시 디지털 기술로 상상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명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이남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모나리자, 모나리자라고 사람들은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당신은 신비의 미소를 떠올리는 숙녀를 꼭 닮았어요. 당신의 모나리자를 닮은 쌀쌀한 미소 때문에, 사내들이 당신을 책망하여 쓸쓸하게 만드는가? 그 미소는 사랑의 유혹인가, 아니면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인가? 많은 꿈이 당신의 집 문을 찾아갔다가 죽었어요. 그대는 따뜻한 사람인가, 차가운 예술품인가?”
냇 킹 콜의 <모나리자(Mona Lisa)> 레코드는 밀리언히트를 했다. 팝 <모나리자>의 작사를 맡은 레이 에반스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소를 신비의 미소, 즉 사랑의 유혹인지 아니면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기 위한 미소인지 알 수 없다고 보았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수수께끼는 미소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나리자> 모델이 누군지 그리고 눈썹 부재로 인한 완성/미완성 논란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모나리자의 ‘모나(Mona)’는 이탈리어에서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라고 한다. 국산말로 하자면 ‘리자 여사’가 되겠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소의 수수께끼는 표현 기법으로도 논의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배경을 보면 마치 모네의 <해돋이, 인상>처럼 엷은 안개가 덮인 듯 윤곽선이 불분명하게 표현되어 깊이감을 더한다. 윤곽선이 연기처럼 사라지듯 표현한 기법을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라고 부른다. 그 스푸마토 기법이 <모나리자>의 미소에도 사용되어 모호한 미소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 그럼 이이남의 <신-모나리자>(2007)를 보자. 평화롭고 온화하게 보이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이이남의 <신-모나리자>에서 전쟁터로 전이된다. 피아노 연주와 함께 모나리자의 뒷 배경 위로 느닷없이 비행기가 출현한다. 그리고 낙하산이 내려오는가 하면 폭탄이 투여되어 폭발음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 파괴된다. 지금까지는 모나리자 배경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런데 비행기가 갑자기 모나리자 유방 앞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모나리자 배경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모나리자의 눈동자가 그녀의 앞으로 비행기가 등장하자 그 비행기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이이남의 <신-모나리자>를 보면서 필자는 문득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가 떠올랐다.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 등장하는 악당이 무섭기는커녕 귀엽게 보이듯이 이이남의 <신-모나리자>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참혹하기는커녕 귀엽게 느껴진다. 이이남의 <신-모나리자>에서 발생한 전쟁이 참혹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이남의 <신-모나리자> 전쟁이 끝났을 때 원래의 모습으로 컴백되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이이남의 모든 작품들을 조회하게 된다면 문득 떠오르게 될 것이다.
자, 이번에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자. 소녀의 표정이 다빈치의 ‘모나리자’만큼이나 알쏭달쏭하다.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과 살짝 벌어진 입술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눈은 마치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우리를 향하고 있다. 그것이 궁금했던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제목을 소설을 썼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터 웨버 감독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2003)는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각색한 것이다.
영화는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콜린 퍼스)와 그의 하녀인 그리트(스칼렛 요한슨 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이이남의 <신-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7)는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압축판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이남의 <신-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화가와 모델 사이의 절대적 간격(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아무런 말없이 단 한줄기 눈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당 필자, 이이남의 <신-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
자, 이번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자. 정선의 <금강전도>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마치 활짝 핀 한 떨기 꽃처럼 그려낸 진경산수화의 결정체로 간주된다. 정선은 암산과 숲을 마치 여성의 자궁처럼 절묘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이남의 <신-금강전도>는 뻐꾸기 울음소리와 함께 정선의 수묵 <금강전도>를 푸르게 변화시킨다. 새소리와 물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헬리콥터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파리 떼처럼 헬리콥터가 금강산 위를 비행한다. ‘금강산 개발’을 하는 것일까? 망치 소리와 함께 금강산 골짜기 마다 건물이 세워지고, 헬리콥터는 여전히 금강산을 가로지른다. 어디서 강력한 폭탄이라도 터진 듯 하얀 연기는 뭉개 뭉개 피어난다. 어느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 쌓인 금강산의 골짜기 마다 세워진 건물들은 불빛을 반짝인다. 물론 헬리콥터는 여전히 사운드와 함께 금강산 주변을 떠돌고 다닌다. 찬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헬리콥터 소리는 사라진다.
이이남은 <신-금강전도>를 ‘금강전투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흔히 ‘관념적인 산수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을 관통하여 정선 자신만의 시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오늘날 누군가 ‘금강전도’를 작업한다면 ‘지금 여기’를 관통하여 작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이이남이 본 오늘날의 금강산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그리고 경제적 측면으로 복잡하게 얽힌 곳이다. 이이남의 <신-금강전도>는 그런 복잡한 현실인식을 관통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이남의 탁월한 분석력은 동양과 서양의 명화 선정에도 나타난다. 이이남의 <모네와 소치의 대화>가 그것이다. 이이남은 모네의 <해돋이, 인상>과 소치의 <추경산수화>를 옆으로 나란히 배치해 놓았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에서 해와 배가 소치의 <추경산수화>로 서서히 흘러가고, 소치의 <추경산수화> 전경에 있는 배와 섬이 모네의 <해돋이, 인상>으로 천천히 흘러간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 해가 소치의 <추경산수화> 산 뒤로 은폐되자 모두 밤으로 바뀐다. 밤이 되자 건물들에 불빛이 밝혀진다. 흥미롭게도 소치의 <추경산수화> 전경에 있는 섬의 집에도 불빛이 밝혀진다. 소치의 <추경산수화>에 쓰여진 텍스트(화제)가 마치 바람에 날리듯 모네의 <해돋이, 인상>으로 날라 간다.
이이남의 <모네와 소치의 대화>는 서로 다른 공간/시간에 제작된 모네와 소치의 그림들을 마치 서로 선물을 주고받듯이 디지털로 ‘이동’시켜 자연스럽게 교감한다. 마르셀 뒤샹 이후 급진적인 작품을 하고자 하는 작가라면 ‘빌려쓰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이남은 명화를 일종의 ‘레디-메이드’로 사용한다. 물론 그는 명화를 그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명화를 그대로 제시한 것으로 만족했다면, 그는 뒤샹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명화를 ‘되돌려-먹이기’ 한다, 어떻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가 그것이다.
차도살인지계? 유하는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1」 밑에 ‘차도살인지계’를 “남의 칼로 적을 침”이라고 언급해 놓았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신-금강전도>는 이이남 자신의 손이 아니라 ‘남의 손을 빌려 상대방을 치는 작품’이란 말인가? 남의 손을 빌린다? ‘남의 손 빌려쓰기’의 최초 사례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뒤샹의 <샘>은 남의 손을 빌려 제작한 작품이지만 ‘적’을 치는 작품은 아니다. ‘적’을 치는 작품? 혹 그것인 기존 작품에 똥침을 놓는 작품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그것을 ‘패러디(parody)’로 부른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패러디는 미술작품에서부터 시나 문학 그리고 음악이나 영화 또한 광고에 이르기까지 주로 명작을 모방(인용 혹은 차용)하여 그것을 풍자 또는 조롱하는 작품으로 이해하곤 한다.
패러디의 어원은 paradia이다. 근데 paradia의 접두사 'para'는 이중의 뜻을 지닌다. 하나는 ‘대응하는(counter) 혹은 반하는(against)’ 뜻으로 두 작품의 대립 또는 비교로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존 작품을 조롱하거나 우습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 작품을 모방(인용 혹은 차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립이 아닌 ‘이외의(beside)’라는 뜻으로 ‘참조’의 뜻을 지닌다. 오늘날 어느 작가가 기존 작품(혹은 ‘사건’)에 ‘대응’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기존 작품을 분석해야만 할 것이다. 근데 기존 작품을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장난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기존 작품(혹은 사건)에 ‘의외의’ 작품을 제작한다? 글타!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기존 명화에 ‘똥침’을 놓는 작품이라기보다 기존 명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이외의’ 작품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차도살인지계'는 해체(deconstruction)의 훌륭한 '무기(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데리다가 싸부의 글을 인용하여 싸부의 폐부를 찌르듯이/해체시키듯이, 이이남은 명화를 차용하여 명화를 해체시킨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이남의 '차도살인지계'는 무엇보다 '옛 작품을 해체'시키기 위해서라도 바로 그 옛 작품을 긍정해야만 한다. 특히 기존 문화에 대한 '똥침'은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때 가능케 되는 것처럼, ‘차도살인지계’ 역시 우리 명화에 대한 자부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부심만 갖고는 2%가 부족하다. 그럼 무엇이 필요한가? 전략! 당신도 알다시피 전략을 구상할 때 상대방의 허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허점? 흔히 그러듯 종교인의 허점은 신앙이듯이 이념을 가진 자의 허점은 그의 신념이다. 그럼 경제인의 허점은? 이윤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허점은? 진실? 만약 예술가의 허점이 진실이라면 아티스트는 진실의 허점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진실의 허점을 어케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놈, 진실은 무슨 얼어 죽을... 모션그래픽 작업이나 열심히 배워라! 껄껄껄.
디지털 팝 아티스트 이이남
아름다운 선녀 그림을 보고 우리는 (특히 넘덜은) ‘그림의 떡’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런 것일까? 북한에서 ‘그림의 떡’을 ‘그림의 선녀’로 쓴다. 미국에서는 그림의 떡을 ‘하늘의 파이(pie in the sky)’로 표기한다. 와이? 미국인들은 하늘의 파이를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 고사성어 중에 화병충기(畵餠充飢)가 있다. 그 고사성어는 ’그림의 떡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다‘라는 뜻한다. 따라서 ’화병충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고 아무런 실속도 없는 일 또는 허황된 상상이나 공상으로서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그 ’화병충기‘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그림의 떡‘으로 사용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림의 떡’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이용할 수 없거나 차지할 수 없는 경우를 뜻한다. 왜냐하면 그려진 떡은 먹을 수 없는 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허황된 생각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그림의 떡은 입이 아닌 눈(시각)으로는 먹을 수 있는 떡이 아닌가? 이를테면 그림의 떡은 시나 영화처럼 우리에게 시각적 허기를 채워준다고 말이다. 그렇다! 그림의 떡은 육체적 배고픔을 채워주지는 못하겠지만 정신적 배고픔을 채워줄 수는 있을 것이다. 원모아, 그림의 떡은 물질적 결핍을 채우지 못하지만 비물질적 결핍을 채워줄 수는 있다. 그렇다면 허황된 상상이나 공상으로 그려진 그림의 떡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아무런 실속도 없는 행위가 아니지 않은가?
필자는 먹을 수 있는 떡만 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로 부르고자 한다.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는 ‘그림의 떡’을 마치 스스로 위안 삼기위한 구실로 간주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는 ‘배’는 채울 수 있겠지만 ‘머리’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는 자신의 ‘머리’ 결핍을 은폐하기 위해 ‘그림의 떡’을 평가절하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는 그림의 떡으로 굶주린 머리를 채워야 하지 않을까?
각설(却說), 이번에는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고 그린 정선의 <단발령 망금강>을 보자. 단발령은 금강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고개라고 한다. 단발령? 머리를 깎는다? 단발령의 이름은 단발령에서 바라본 사람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을까? 정선의 <단발령 망금강>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의 시 혹은 아름다운 가야금 소리를 연상케 하는 정선의 <단발령 망금강>은 단발령과 금강산 사이를 광활한 여백으로 처리해 놓았다. 그 여백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느껴진다.
이이남의 <신-단발령 망금강>(2009)은 마치 가야금 운율처럼 느껴지는 피아노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단발령 고개에 당도한 선비들은 아름다운 금강산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금강산과 단발령 사이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더니 최첨단 도시가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선비들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도시 풍경을 보고 놀란다. 몇 선비는 그 소문을 알리기 위해서인 듯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갑자기 단발령 고개에 케이블카가 등장한다. 선비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환상도시 위를 지나 금강산을 향한다. 관객은 이이남의 <신-단발령 망금강>을 보면서 폭소를 터트린다. 하지만 이이남의 <신-단발령 망금강>은 관객에게 케이블카를 탄 선비들이 최첨단 도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조용히 자문하게 한다.
개성시 북부 박연리에 있는 박연폭포는 명유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기도 한다. 박연폭포는 높이 37m, 너비 1.5m로 우리나라 3대 명폭의 하나이다. 정선의 <박연폭포> 높이는 선비의 크기에 비유할 경우 족히 100m가 되어 보이고, 너비는 4m 정도로 보인다. 혹자는 정신의 <박연폭포>를 보는 그림이 아니라 듣는 그림이라고 해석했다. 이를테면 정선의 <박연폭포>는 청각의 시각화라고 말이다. 물론 정선의 <박연폭포> 크기는 세로 119.4㎝, 가로 51.9㎝이다.
그런데 이이남의 <신-박연폭포> 크기는 46인치 LED TV 여섯 대를 세로로 쌓아 올려 6M에 달한다. 따라서 관객이 이이남의 <신-박연폭포> 앞에 서면 폭포소리와 함께 LED TV로 물줄기가 흘러내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느껴 압도당한다. 물론 이이남의 <신-박연폭포>는 폭포의 장엄함 이외에도 쏠쏠한 재미도 삽입되어 있다. 폭포수 위에 쓰여진 화제와 호 그리고 낙관인이 너럭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어 이루어진 박연 연못에서 폭포수를 따라 용바위가 있는 고모담(姑母潭)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것을 보고 선비들은 무슨 말을 주고받는다. 반면 동자는 무슨 일인지 그림 밖으로 사라지는가 하면 다시 등장해 범사정(泛斯亭) 앞을 배회하기도 한다. 왜 이이남은 정선(이름)을 폭포수로 떨어트린 것일까?
한 선비 왈,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박진사가 그 폭포에 놀러왔다가 폭포 밑 못 속에 사는 용녀(龍女)에게 한눈에 반해 부모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모른 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귀가하지 않자 그 폭포에서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폭포 밑 담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담을 고모담이라 하고, 박씨의 성을 따서 박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다른 선비 왈, “다른 전설에 의하면 박진사가 폭포의 장관에 반해 폭포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주변을 배회하는 동자가 중얼거리기를 “겸재 선생님께서 박연폭포의 장관을 그리고 나서 빠져 죽은 것은 아닐까?”
2009년 이이남은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모델 삼아 작업하기도 했다. 이이남의 <신-마를린 먼로>는 앤디 워홀의 <마를린 먼로>를 디지털로 재매개 시킨다. 흔히 마를린 먼론의 트레이드마크로 입술 위의 점을 든다. 이이남은 앤디 워홀의 <마를린 먼로>의 점을 천천히 움직여 이마에 위치시켜 놓았다. 이마에 점이 있는 마를린 먼로? 이이남이 마를린 먼로의 점에 주목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팝 아티스로 리히텐슈타인의 <우는 여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의 상징은 바로 일종의 ‘망점’이다. 이이남의 <신-우는 소녀>는 눈물을 흘리는데, 바로 그 흘린 눈물 때문에 망점들이 사라진다(날아간다)는 점이다. 마치 눈물 때문에 화장이 지워지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우는 여자’인가?
2008년 <모네와 소치의 대화>를 시도했던 이이남은 2009년 <겸재 정선과 세잔>의 교감을 시도한다. 이이남의 <겸재 정선과 세잔>은 정선의 <장안연월>과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을 모델로 삼은 작업이다. 정선이 1741년경 안개 낀 밤의 남산의 풍경을 그린 <장안연월>과 세잔이 1904년경 그린 <생 빅투아르 산>이 만난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모네와 소치의 대화>처럼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한 화면에 차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우선 정선의 <장안연월>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마치 먹이 번지듯이 풍경이 번진다. 그 번진 자국에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이 오버랩 되어 결국 정선의 <장안연월>은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으로 전이된다. 흥미롭게도 정선의 <장안연월>과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선의 <장안연월>은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보다 100년이 넘는 시기에 그려졌다.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에 제작된 그림들이 이이남의 디지털 아트로 서로 스며든다.
이이남이 차용한 명화들은 대부분 자연을 그린 그림들이다. 왜일까? 왜 그는 자연을 그린 명화를 즐겨 차용한 것일까? 그는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대학시절까지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다. 물론 그는 당시 "농삿일이 죽도록 싫었다“고 한다. 그는 ”왜 시골에서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할까“를 입에 달고 살았단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의 ”시골 경험이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의제 허백련의 그림을 적잖이 차용했는데, 허백련 그림에 그려진 풍경이 이이남의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을 그린 그림들을 자연스럽게 즐겨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온화하고 서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이남의 작품들을 보고 ‘착하고’ ‘예쁘고’ ‘범생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비아냥에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는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아트’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무거움’을 ‘어깨’에 짊어지게 하기보다 오히려 웃음(가벼움)을 선사하는 ‘행복전도사’를 자처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이남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디지털 팝 아티스트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디지털 팝 아티스트인 이이남은 좀 더 대중에게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유통문화’를 만들고 있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저렴한 가격으로 작품을 구입해서 벌 수 있는 유통구조 말이다.
앙드레 말로는 “상상의 미술관이 자신의 변모를 계속 추구한다”고 진술했다. 백남준은 미술관을 방문했던 관객들이 TV 앞에 모여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다. 그는 1984년 서울과 뉴욕, 파리, 베를린의 TV를 통해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을 방영했다. 그는 미래의 미술관을 대중매체로 보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것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제2의 백남준으로 불리는 이이남은 서두에서 중얼거렸듯이 스마트 TV뿐만 아니라 모바일과 아이패드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물론 당신은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여 소장할 수도 있다. 아이폰 어플에 있는 10작품은 단 1.99달러에 구입할 수 있고, 아이패드 어플에서는 12점의 작품을 3.99달러에 소장할 수 있다. 만약 아날로그 아트가 희소성을 지향했다면, 디지털 아트는 대중성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이이남의 미디어 아트
레프 마노비치 (미디어 이론가/뉴욕시립대 교수)
이이남은 자신을 ‘뉴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뉴 미디어 아티스트’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1990년대 미국, 유럽 그리고 일본에서 “뉴 미디어 아트”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컴퓨터를 사용한다는것은명령어의 구성을 통해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명령어들은 모니터에 보이는 화면을 변경하고, 컴퓨터에 연결된 다른 장치들을 제어하며, 주변 환경을 감지하여 관객 및 주변 공간과 상호작용하도록 한다. 1990년대 뉴 미디어 아트의 예로는 작가들의 웹사이트, CD-ROM을 이용한 인터랙티브 인터페이스,그리고 인터랙티브 설치를들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동유럽과 남미에서는 작가들이 비디오 기기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뉴 미디어 아트’는‘비디오 아트’를 의미하기도 했다.
오늘날, 컴퓨터에 의존하지 않은 생산, 출판 그리고감상을 위한문화 상품이나체험은 찾기 어려워 졌다. 예를 들어 음악, 건축, 공간 디자인, 제품 디자인, 영화와 애니메이션은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제작된다. 또한비디오게임,수백만 개의 모바일 앱,웹사이트,그리고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에서 공유되는 이미지와 동영상은 서버, 모바일 기기,인터넷, WIFI,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소프트웨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의‘뉴 미디어 아티스트’, 또는 간단히 ‘미디어 아티스트’는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할까? 이이남은다수의 작품에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지만,컴퓨터를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당연하게받아들여지는 설치, 퍼포먼스, 장소 특정적 예술이 발전하기도 전에, 이미 1950년대부터 컴퓨터를 이용한 작품이제작되었다.따라서 컴퓨터 아트는 제2차세계 대전 이후의 미술 양식만큼이나 오래되었고,최신의 미술 양식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이이남은 좀더 깊은 의미에서의 (뉴)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그는 스마트폰, 초고속 네트워크,또는 오픈 소스 하드웨어와 같은 최신 미디어 기술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의 미디어 기술들은 때로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왜 TV를 짊어졌을까? (2014)에서 그리스도는 최신 삼성 평면 TV가 아니라,작가가 청소년기에봤을법한 오래된 옛날 TV를 옮기고 있다. 그가 미디어 아티스트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미디어의 역사와 인간이 사용하는 미디어 기술들의 표현적이고 미학적인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이남은 마치 미디어 역사가(또는 미디어 고고학자)처럼, 두 개 또는 더 많은 매체를 병치하는 비교 연구법을 사용하여 서로를 대면하도록 하고,그것들의 한계를 드러내고, 매체의 성질들을 교환하고, 새로운 관계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병치는‘기존의 미디어’와 ‘새로운 미디어’,‘아날로그’와 ‘디지털’, 또는 ‘조각’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대립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이남의 예술에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가 다양한 미디어 재료를 이용한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 재료들은 권력, 전쟁, 종교, 천연자원 착취, 인간 간의 경쟁, 빈곤, 고통, 황홀과 연결된 그들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이이남의 미디어 아트를 통해 활성화된다.
신-수련 2 (2007)에서, 클로드 모네가 인생의 마지막 30년동안 그의 정원에서 그린 250 점의 수련 중 한 점을 배경으로섬세한 애니메이션이 겹쳐져 있다. 모네는 유화물감의 성질을 최대한으로 연구하여, 물에 반사된 꽃의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한 번의 붓질을 통해 회화적인 흐름으로 표현하였다.여기에 더해진 섬세한 디지털 애니메이션은 원작에서캔버스 위의 마른 물감이라는 물성을 줄이고,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처럼 변화시킨다.그러나우리는 모네가 수련을 그리는 동안 시력을 잃어 갔고, 다른 건강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유화 물감이라는 재료가 더 이상 작가의 제어를 받지 않고 새로운 활기를 얻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창조자의 제어 하에있지 않을 때재료는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따라서회화 재료의 해방은 인간의 고통과 병을 동반하기도 한다.
다른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처럼, 모네는 또한 일본 판화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공간의 평면성, 우아하고 복잡한 선들, 비대칭적 구성, 잉크에 적신 붓 자국, 일관된원근법의 부재, 움직임의강조, 풍경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의 재창조 등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전통 회화의특성은 인상파의 시각적 언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후에 근대 서양 미술은 이러한회화적 언어로부터 발전되었다.
동양화의 이미지들은 이이남의 작품에 자주 나타난다. 원래의 재료에서 벗어나서빛으로 색을 표현하는 전자 모니터로 옮겨진 이미지는 새로운 힘과 강렬함으로 빛난다.종이나 비단에서 전자 모니터상으로의 변화는 중요하다. 이이남은 이미 다른 미디어 기술들간의 통로를 설립해놓은 것이다.
책-산수도(1)에서와 같이,이이남은고전 동양화에 움직임을 부여하는데 이는대단한 역설을 만든다. 중국과 한국의 고전화가들은작품에서 움직임을 전달하고끊임없는변화감을 주기 위해 정교한 기술을 발전시켰다.평면적인 배경으로 사라지는 언덕과 산의 모양, 고의적으로 보이는 붓자국, 특정적인 풍경의 선택은 정적인 이미지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이러한 그림들을 이미 애니메이션의 한 종류로 본다면,왜 현대 작가들은 여기에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더해야만 할까?
나는 동양화와결합된 애니메이션의 역할 중 하나는,예전에는 삶의 흐름 - 즉 오늘날 애니메이션이 가진 역할 - 을 보여줬던 전통 동양화가 이제는 유리 케이스와 경비원,경비 시스템으로 보호되는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어버린 현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작품들은 또한 미술 시장,화랑 시스템, 박물관과 소장가들의 포로가 되었다. 실제 동양화가 미술관에 갇혀 있는 동안,이이남의 장난기 많고 유머러스한 애니메이션들은 원작의 흐름과 움직임을 재창조한다. (게다가 책-산수화에서는 두 개의 고전 그림들이 미술품 경매 도록에 인쇄된 이미지로나타난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책-산수화에서는 그림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Dreamscape 1)(2) 작고 뚜렷한 요소들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조그만 인물들이 그림을 가로지르고 새들은 그 위를 날아다닌다. 작은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제한된 애니메이션은 스트로보스코프 stroboscope, 페나키스토스코프phenakistoscope,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 조에트로프zoetrope 등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 19세기의 다양한미디어 기술을 생각나게끔 한다. 이이남의 작품에서 보이는,고전 회화에 덧붙여진 움직이는 디테일처럼,이러한 기술들은 오직 한 개 또는 몇 개의 움직이는 인물들을 가끔 컬러 배경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이남의 작품들은 다양한 역사적이고현대적인 미디어 기술과 그들의 문화사 간의 소통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림의 역사를 논하는 ‘화가’나 조각의 역사를 말하는 ‘조각가’와는 달리, 이것이 이이남이 미디어 아티스트인 이유이다. 이이남의 작품에서는 서양의 유화나 동양화, 조각,영화, TV, 금속, 물, 빛, 전기 등 다양한 매체를 만나게 된다.그의 작품을 즐긴다면, 그것들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세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http://www.seditionart.com/lee_lee_nam/book-landscape.
2. http://www.seditionart.com/lee_lee_nam/dreamscape_1.
“리부팅”—한국 현대미술 중국전시회
黄篤(Huang Du, 중국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리부팅: 한ㆍ중 수교 20주년 기념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가 중국전>(ReBooting: 2012 The Special Exhibition of the Korean Contemporary Art) 이 2012년 9월 11일부터 22일까지 베이징 옌황예술관(炎黃藝術館 Yanhuang Art Museum: China Minsheng Bank art organization)에서 개최되었다. 전시회 개막식에 많은 중국 및 한국 미술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김영순 커미셔너가 제시한 ‘리부팅’이라는 매우 매력적인 주제에는 한국 현대미술의 ‘리부팅’ 뿐 아니라 한∙중 양국 현대미술의 동아시아적 문화가치 추구작업의 ‘리부팅’이라는 이중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금번 전시회가 지난 20년간 중국 내에서 접했던 한국 현대미술전 중 학술적 수준이 가장 높은 전시회라고 생각한다. 김영순 커미셔너는 본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되면서 베이징 소재 전시회장을 몇 번씩이나 답사하며 제한된 시간 내에 전시회 전체 구도 및 대표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육근병, 이용백, 김아타, 배영환, 김지원, 안필연, 김종명, 이이남, 이기봉, 정연두 등 작가들의 뉴미디어 아트, 사진, 회화, 설치작품 등을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본 전시회는 관람객에게 생동감, 풍부함, 관념성 등을 전달하기 위해 개별 작품의 위치 및 작품간 관계의 공간적 배치를 통해 매우 리듬감 있는 전시를 구현했다. 즉, 작품과 작품, 작품과 공간, 작품과 관람객 간의 유기적 연계를 부각시켰는데, 이는 기획자의 심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전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국 현대미술 분야의 대표 작가와 작품,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스타일, 관념 및 형식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시기획자인 김영순 커미셔너는 금번 전시를 통해 동아시아적 문화 가치를 복원하고자 했다.
금번 전시회에는 최근 베니스비엔날레, 독일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 한국 광주비엔날레 등 세계 예술무대에서 활약해온 한국 내 사진 및 뉴미디어 작가, 화가, 설치예술가 10명의 작품 31점이 전시되어 30년 역사를 지닌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상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1층 전시장에는 비디오아트 작품들이 전체 공간에 걸쳐 유기적으로 배치되었다.
이용백의 뉴미디어 작품 <Angel soldier>는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전시된 작품으로 퍼포먼스와 연극적 요소를 접목한 비디오영상을 통해 아름다움과 폭력간의 변증법적 시각 철학을 전달한다. 즉, 아름다운 듯 보이는 사물 속에 불확실한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고, 언뜻 폭력적으로 보이는 사물 속에 어떤 아름다움이 잉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기 작품과 함께 전시된 작가 육근병의 <불>(Messenger’s message>는 199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 출품된 작품으로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비디오아트이다. 작품에 표현된 끝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관람객들은 물질의 에너지와 확장성, 그리고 작품의 시각적 장력과 인간 내면에 타오르는 열정이 상호 호응됨을 느끼게 된다.
최근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멀티미디어작가 이이남의 작품<모네-진농-소치의 대화> 는 3대의 LED TV 화면으로 3개의 명화액자를 구성했다. 작가는 디지털기술을 활용하여 모네의 ‘일출’, 중국 청대 진농(金農)의 ‘월화도축(月華圖軸)’, 조선 말기의 문인화가 소치(小痴)의 ‘산수화’ 등 세 폭의 명화를 시공을 초월하여 교유하도록 함으로써 시적(詩的) 이면서도 모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즉, 3대의 모니터 화면 속 그림들이 서로 넘나들며 상호 간섭과 위치 이동이 일어남으로써 애초에 그림이 가지고 있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영상예술 언어와 형식이 구축된다.
이번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본 작품은 비디오아티스트 정연두의 작품<공중 정원>(The Hanging Garden, 2009)이다. 이 작품은 양복을 입은 아나운서가 특정 사건을 이야기하는 영상과 해당 영상의 현장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전체 뷰 영상으로 이루어지는데 작가는 역사적 다큐먼트(document)를 통해 분당신도시의 현실과 비현실 간의 경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정연두 작가는 실재하는 객관의 재현과 ‘진실된’ 주관의 구성을 통해 <보라매 댄스홀>, <원더랜드>, <내 사랑 지니>, <도쿄 브랜드 시티> 등 현실과 비현실(사진)이 오묘하게 접촉된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서술과 현실의 묘사라는 미묘한 관계 속에서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기 어렵게 한다. 다시 말해 장소의 기억과 창조의 기억간에 전도가 일어나는데, 이것이야말로 예술 관념과 기술 미학(aesthetics of technology) 핵심이다.
정연두의 이러한 관념과 달리 작가 김아타의 <On-Air Project 153-1 The Monologue of Ice> 는 매우 ‘관념적인’ 영상작품이다. 작가는 얼음을 이용하여 실물과 흡사한 파르테논 신전 모형을 만든 후 2주간 상온에서 녹아 내리는 과정을 촬영하여 고체가 액체가 되고 액체가 다시 수증기가 되어가는 상태를 보여준다. 작가는 동양 철학적 관념에 기반하여 존재와 허무의 경계를 뛰어넘어 존재의 동일성과 지속성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는 얼음으로 만든 파르테논신전이 녹아내려 사라지는 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하여 강고하기만 했던 현대 서양의 가치관이 변화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즉, 이 세상에 영속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이치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술가 배영환의 미디어 설치 작품<유행가-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Pop Song- Knocking on the heaven’s Door)는 도시의 우울과 향수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도시 담벼락 위 철제 방범창이 설치된 창문에 비친 한가하게 노니는 물오리 영상과 그에 어울리는 유행가를 함께 연출했다. ‘유행가’는 사회적 지위의 고하나 빈자와 부자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세월의 기억을 지니고 있을 뿐… 본 작품이 지닌 관념적 가치는 관람객이 중층적 함의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즉, 관람객의 시각에서 보면 오리가 특정 장소에 갇혀있는 것 같지만 작품 속 오리의 관점에서 보면 철창 너머 관람객이 집 안에 갇힌 것 같이 보인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미지가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각 개인의 경험과 느낌에 따라 받아들이는 메시지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2층 전시장은 공간이 높고 밝기 때문에 기획자가 나머지 작가 4명의 회화작품과 설치작품을 이 곳에 배치했다. 계단을 올라가 2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안필연의 거대 설치작품 <모멘텀momentum>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나팔꽃 형태로 제작된 12폭의 천막 아래 2mx3.8m 크기의 타원형 황금알이 설치되었고 꽃 형태의 천막과 타원형의 황금알로 미니멀아트 형식을 구성한다. 그의 미니멀아트 개념은 물질을 넘어 우주의 무한한 생명과 인류의 생명의식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일종의 의식(儀式)으로서의 느낌과 아시아 문화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유화작가 김지원은 작품에서 맨드라미(‘Mendrami’: cockscomb) 를 소재로 하여 꽃의 다양한 자태와 표정을 표현했는데 꽃을 의인화하여 마치 초상화를 보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꽃의 시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질서를 타파하고 회화의 본질과 인류의 질박한 감각의 회복을 시도한다.
김지원의 회화작품과 달리, 화가 김종학의 작품 <Flame Flower>는 다양한 매개물을 통해 현실과 일루전 사이에서 회화의 본질을 탐색한다. 그의 회화는 사실주의, 표현주의, 컨셉츄얼, 미니멀아트 등의 예술언어적 요소를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과의 접목을 통해 손으로 그린 전통 회화의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킴으로써 대중적, 민간적, 전통적 요소들이 작품 속에서 융합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철판 위의 붉은 장미 이미지가 문화담론적 요소를 상징하고 있고, 회화의 이미지가 기성품 및 문자기호 등과도 결합되어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시간의 지속성을 형상화하고 시각∙촉각적으로 조소적 느낌이 강한 공간을 구축하여 장르간 경계가 허물어진 포스트모더니즘적 화면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이기봉의 작품 To Last-Oblivion 은 다른 작가와 달리 한 폭의 서정적인 풍경과도 같다. 안개가 자욱한 풍경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나무들, 마치 흰색의 작은 글자처럼 보이는 수면 위에 상감된 작은 구슬들… 바로 이 모호한 풍경이 관람객에게 일종의 환각과 시적인 느낌을 준다. 부드럽고 묵중한 화면은 독특한 느낌을 전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자아에 대한 체험, 자연에 대한 감성, 영혼의 명상, 시적인 연상 등을 떠올리게 한다.
<리부팅> 전시회가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한∙중 양국 현대 미술 모두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 하에서 20세기 구미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자체 문화적 전통 및 개별적 느낌은 대부분 간과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세계무대에서 동아시아 문화 및 예술의 주도적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전시 교류 및 아티스트 간의 상호 교류가 특히 중요하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리부팅’전이야말로 양국 문화에 대한 상호 이해 증진과 양국간 우호관계를 세계무대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실천사례가 아닐까 한다.
참고:
필자명 영문표기: Du Huang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t Council Korea.
커미셔너 김영순 영문표기: YoungSoon Kim
출품작가영문표기:
김아타 金我他 Atta Kim
김종학 金鐘鶴 JoNak Kim
김지원 金智源 JiWon Kim
배영환 裵榮煥 YoungWhan Bae
안필연 安畢姸 PhilYun Ahn
육근병 陸根丙 KeunByung Yook
이기봉 李基鳳 KiBong Rhee
이용백 李庸白 YongBaek Lee
이이남 李二男 LeeNam Lee
정연두 鄭然斗 YeonDoo 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