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의 작업
플록코트를 입은 낭만주의자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비닐봉지. 비닐봉지가 날아다닌다. 세계 도처를 날아다닌다. 정처 없이 날아다닌다. 그렇게 비닐봉지는 오지에도 가고 도시에도 간다. 평화로운 곳에도 가고 분쟁지역에도 간다. 그렇게 날아다니면서 비닐봉지는 가는 곳마다 뭔가를 흩뿌리는데, 씨앗이다. 생명의 씨앗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무슨 인격체마냥 비닐봉지의 시각에 포착된 세상을 보여주고 비닐봉지가 본 세계를 보여준다.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생명의 씨앗을 퍼트리는 전도사로 의인화된 비닐봉지를 보여준다. 보기에 따라서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정처 없는 삶의 알레고리 같고, 빈 봉지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의미의 공수래공수거를 변주한 것도 같다.
또 다른 작업에서 비닐봉지가 실내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비닐봉지가 아니라 비닐봉지들이다. 선풍기의 바람에 반응하면서 비닐봉지들이 코너에 몰려 있는 것도 같고 웅성거리는 것도 같다. 그렇게 뜻 모를 소리로 웅얼거리면서 이따금씩 꽤 높게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코너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렇게 꽤 높게 날아오른 비닐봉지가 영상으로 재현된 둥근 달을 스치면서 달 표면에 패턴을 만들고 달그림자를 만들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작가가 부친 제목(달빛 소나타)마냥 꽤 낭만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굴삭기들이, 가습기가, 하이웨이와 자동차 모형이, 그리고 여기에 하늘을 나는 아톰과 같은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끼어들면서 낭만적인 풍경은 그로테스크한 정경으로 변질되고 소나타는 레퀴엠으로 전환된다. 실제로는 하나같은 모형들이지만 근접 촬영한 영상이 실물처럼 보이고, 저보다 큰 키로 벽면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낯설게 보인다. 그렇게 어떤 굴삭기는 연신 물을 퍼내고 다른 굴삭기는 뻥튀기(웬 뻥튀기?)를 퍼내지만 대부분의 굴삭기들은 그저 헛 삽질을 반복해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가습기가 뿜어내는 연무가 마치 건물굴뚝이 뿜어내는 오염물질 같다. 아마도 무분별한 개발과 경제드라이버를 풍자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동차 모형이 미친 것 같은 속도로 하이웨이를 내달린다. 그렇게 내달려봤자 한정된 틀 안을 무슨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맴돌 뿐이다. 아마도 더 이상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고삐 풀린 속도경쟁을 풍자한 것일 터이다. 이 모든 을씨년스런 정경 위로 아톰이 붕붕거리면서 날아다닌다. 여기서 아톰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구원하러온 정의의 사잔지 아니면 미친 세상에서 파견된 감시잔지가 불분명하다.
그렇게 작가는 저 홀로 선한 빈 봉지의 눈에 비친 무슨 세기말적 풍경 같은 세상풍경을 보여준다. 그 배경음으로 랩소디가 음울하게 깔리는 무슨 느와르 영화 속 한 장면(흔히 뒷골목에 비닐봉지가 굴러다니는) 같은 세상풍경을 예시해준다.
십 원짜리 동전. 하늘에서 십 원짜리 동전이 비처럼 솟아져 내린다. 마치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신을 맞아들이는 디아나를 그린 구스타브 클림트의 그림 같다. 때로 십 원짜리 동전은 눈에 띠게 천천히 떨어져 내리면서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고 아롱거리는 것이 환상적이고 신비스럽다. 환상적이다? 신비스럽다? 바로 아우라다. 물신이다. 재화는 단순한 물질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에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재화를 꿈꾸고 대박을 꿈꾼다. 여기에 국내외 정치사의 단면들이 배경화면으로 흐르면서 오버랩 된다. 영상 속 선남선녀들이 재화를 약속하고 대박을 약속한다. 유토피아를 약속하고 지상낙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애초부터 지키지 못할 빈말임이 드러나고 허언임이 폭로된다.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없었다(유토피아는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란 의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약속한다? 이로써 작가는 일장춘몽의 부질없음(꿈 깨!)을 주지시키고, 정치적 선동과 거짓말의 덧없음(거짓말 하지 마!)을 주지시킨다.
뻥튀기. 이번에는 하늘에서 뻥튀기가 솟아져 내린다. 건물 뒤에 숨은 뻥튀기 기계로부터 무슨 총이라도 쏘듯 느리게 때로 빠르게 연신 뻥튀기를 하늘로 쏘아댄다. 그렇게 수북이 쌓인 뻥튀기를 사람들이 와서 먹는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해 사람들을 먹였다는,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먹였다는 성경의 오병이어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먹고사는 문제, 식량문제, 정당한 분배와 관련한 정의의 실현문제를 주제화한 것일 터이다. 여기에 뻥튀기와 관련한 작가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최초의 발상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또 다른 작업에서 프라다의 수석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포장용기로 뻥튀기를 포장한다. 가장 값 싼 것을 가장 값 비싼 용기로 포장한다? 여기서 작가는 아이러니를 건드린다. 사람들은 프라다에 주목하지, 누구도 뻥튀기에는 관심조차 없다. 여기서 프라다는 실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프라다 포장지며 프라다 로고면 충분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건 한갓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알맹이고 실재다. 알맹이가 있고서야 포장지가 의미가 있고, 실재가 있고서야 상징이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로써 작가는 누구도 실재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시대, 이미지를 쫒고 겉보기만을 추구하는 시대를 풍자한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거나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새삼 되새기게 만든다.
생각하기. 그리고 작가는 각각 밥그릇을 발로 차는 행위에 대하여, 허물어진 건물에 대하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환경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제안한다.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한 템포 쉬면서 엄숙한 자세로 생각한다. 다시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끊고 정중한 태도로 생각에 잠긴다. 다시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를 반복해 보여준다. 왜 작가는 죄 없는 밥그릇을 발로 차는가. 그리고 자기가 찬 밥그릇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작가의 이 작업은 역설적 표현으로 봐야 한다. 즉 밥그릇을 발로 차는 작가의 행위는 사실은 밥그릇을 발로 차서는 안 된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연탄을 발로 차지 마라는, 너는 저 연탄처럼 자기 몸을 불살라 다른 누군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준 적이 있느냐고 연탄을 발로 차는 사람을 질책하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먹고사는 문제는 그저 존재를 연명하기 위한 일차원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존엄에 속한 문제라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얼마 전 멀쩡한 건물이 무슨 피사의 사탑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뉴스보도가 있었다. 작가는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지금 그 건물은 첨단의 해체공법으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실없이 반문해오는 것도 같고, 심지어 소음도 먼지도 없는 것이 무슨 게 눈 감추듯 뚝딱인 것도 같다. 현실과 초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이미 초현실이고, 초현실이 진즉에 현실이었다. 황금시간대에 속하는 저녁뉴스가 온통 이런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성과 비이성의 차이가 지워지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상으로 도배돼 있다시피 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치부는 가급적 빨리 숨기고 가리고 지워지고 사라져야 한다. 작가는 그 치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작가는 한 한적한 시골 버스 정류장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같은 사람들(노부부?)의 모습을 기록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읍내에 있는 주민 센터나 노인정에 매일같이 출퇴근하는 것일 터이다. 일상은 다람쥐 채 바퀴 돌듯 똑같은 일의 연속이고 반복이다. 그러나 사실은 똑같지만 똑같지가 않다. 미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반복속의 차이, 그 속에 차이를 내포한 반복,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을 살고 실천하는 일의 소중함을 주지시킨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리고 굳이 몰라도 상관이 없는 익명적 주체들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일이 어떤 경건함(무슨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에서와 같은)마저 자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일련의 설치미술을 통해 환경오염으로 빙하가 녹아내리는 것에 대하여,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새 시대(아마도 환경이 확 달라진 시대)가 열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환경을 주제화한 한편, 그 주제를 실제 환경 속에 풀어놓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지예술로 볼 수가 있겠다.
주로 영상이지만, 작업 속에서 작가 이경호의 모습은 한결 같다. 목을 덮어서 가린 긴 뒷머리와 깃을 세워 입은 플록코트가 시대착오적인 수도승 같은 인상을 준다. 나만 그런가. 여하튼. 짐짓 진지하고 경건함마저 자아내는, 시대에 대한 입장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낭만적(혹은 낭만주의적) 예술가상을 떠올리게 만든다(리얼리스트가 아니고?).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은 비닐봉지와 십 원짜리 동전, 뻥튀기와 밥그릇 같은 하찮은 것들, 별 볼일 없는 것들, 소외된 것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 일상을 사는 문제, 그리고 환경과 같은 평범한 문제를 고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문제들의 배경에는 언제나 이런 소외된 것들이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 모든 삶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작가가 있다. 밥그릇을 발로 찰 때(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될 때?)도, 건물이 붕괴될 때(시대가, 사회가 허물어질 때?)도, 일상이 중계되고 환경이 재앙에 처했을 때도 그곳에는 어김없이 작가가 있었다. 스스로를 현장의 증언자이며 시대의 목격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카탈로그 서문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전, 2014. 2. 21~3. 6, 쿤스트독)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
책임기획 : 김성호(미술평론가)
IV. 이경호의 '창조적 역설'
이경호는 이번 전시에서 영상과 설치 작업을
통해 '창조적 역설'을 재해석한다.
작품 <Jackpot !>은 제명이 상기하듯이, '대박(Jackpot)'이란 단어가 던지는 역설적 의미를 탐구한다. 이경호는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스위스 다보스포럼 연설 중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과 더불어 자신의 아들과의 대화에서 사용된 '대박'이란 발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을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즉 '대박'이라는 같은 단어의 다른 쓰임새에 주목한 작가는 '조소(嘲笑)적 문제제기'와 '비판적 성찰'의 양단에 선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대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작품은 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영상 작업과 돈의 실재를 드러낸 설치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상 작업은 돈이 무더기로 떨어지는 장면을 고속카메라로 근접 촬영하여 슬로우 영상으로 틀어주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장엄한 한 동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전시장에서 가장 높은 천장을 지니고 있는 벽면에 투사되어 비장하고도 장엄한 숭고미를 드러낸다. 천천히 떨어지는 클로즈업된 동전들의 낙하를 더욱 숭고한 무엇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음악들이다. 동전들은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e)의 감미롭고도 애잔한 노래와 더불어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처연한 노래와 애절한 재즈 선율에 실려 춤을 추듯이 천천히 낙하한다. 인간의 만남과 사랑에 관한 노래 가사들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낙하하는 돈이란 인간 욕망에 대한 또 다른 메타포이다. 그것은 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우리의 '사랑하기'와 닮아있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인간이 살아가기 힘들듯이, 돈 없이 인간은 살기 힘들다. 양자 모두는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이렇듯 '돈, 욕망, 사랑'이 겹쳐진 그의 영상에는 인간의 금전을 향한 욕망 뒤에 추락하는 인간상마저 오버랩되어 있다. 그것은 애처롭거나 처연한 것이자, 삶의 끝자락에서 부둥켜 잡는 가느라단 끈처럼 위태롭기조차 하다. 영상은 후반부에 이르러 캐넌 앤더슨(Canan Anderson)의 전자 바이올린 연주곡에 따라 빠른 속도로 전개되기 시작된다. 끝없이 추락하기만 하던 동전들의 무리는 이경호가 만들어낸 컴퓨터 그래픽의 옷을 입고, 원형 군무를 추면서 '돈'의 공연을 펼친다. 그것은 매우 흥겨운 공연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스펙터클이다. 그 공연 한 가운데에 세계 근현대사의 처절했던 사건들을 담은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동전'에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켰던 각 나라의 왕, 여왕, 독재자들의 모습은 물론이고, 정치가, 예술가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흩뿌려지면서 영욕 속에 생멸했던 근현대 제국의 역사가 우리의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거기에는 1, 2차 세계대전, 캄보디아 내전, 광주의 민주화운동, 아랍 혁명, 20/21세기 테러 등의 참담한 역사의 내러티브가 있다. 그 뿐인가? 거기에는 관중의 환호에 응답하는 격한 현대 전사들의 UFC격투기의 장면이,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의 야만스러운 해학이, 찰리 채플린의 코믹하고도 우울한 제스처가 함께 뒤섞여 있기도 하다. '돈'이 야기한 신자유주의의 그늘은 이전의 참담한 역사조차도 상업화한다. 그렇다. 어느 시대에나 돈이란, 마치 빌리 할리데이가 부른 또 다른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에게 "나뭇잎과 뿌리가 피로 물든" 나무에서 열리는 "이상하고도 쓰디 쓴 열매"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타락의 길로 우리를 유혹하는 낙원의 선악과인 것이다. 우울하고 처연한 영상 밑으로 전시장 바닥에는 실제의 10원짜리 한국 동전과 대만 동전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돈 무더기'이다. 70만원에 이르는 분량의 동전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가운데 금빛 장난감 포크레인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3대의 포크레인이 연신 기계음을 내며 움직인다. 관객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센서에 의해 비로소 작동하는 포크레인은 자기 본연의 업무를 지속한다. 흩어진 동전들을 하염없이 담으려고 버둥거리지만, 동전들은 자꾸 미끄러져간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하나의 은유이다. 장남감 포크레인은 개발 지상주의를 발전으로 착각하는 이 시대의 지도자, 경제논리에 골몰하는 지배세력을 은유한다. 일예로, 폐쇄카메라를 통해 장난감 포크레인을 촬영하고 실시간으로 벽면에 거대한 움직이는 그림자로 드리운 그의 이전의 영상, 설치작업은 하나의 은유임과 동시에 역설이다. 작품은 포크레인으로부터 당시의 한국적 상황을 관객에게 떠올리게 만들면서도 '기도(prayer)'라는 제목으로 인해 소원/비판, 기도/저항과 같은 대립적 개념을 관객에게 혼성된 무엇으로 인식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장난감 포크레인은, 이 시대의 지배계급에 대한 '은유'이자, 비판적 저항 메시지 자체를 희화시키고 풍자하는 '역설'이기도 하다. 포크레인이 동전 하나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면서도 연신 굉음을 내며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원일이 기획한 한 국제전에 참여했던 그의 또 다른 작품' 역시 장난감 롤러코스트를 화면에 확대 프로젝션한 후 시계의 초침과 대비시켜냄으로써, '빠름/느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시간의 의미에 꿈과 허상의 의미를 대비"시키는 서사를 통해 역설을 실천한 바 있다. 이원일은 한 서문에서 이경호의 이러한 대비적 서사에 근거한 역설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 〈디지털 달(Digital Moon)〉을 해석하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감을 추구한 "꿈과 카오스의 이중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긍정과 부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이경호의 새로운 디지털 작업들은 (중략) 변형과 침묵 사이의 유연한 중개적 과정을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으로 접근하여 자아와 세계의 비선형적, 불가해적 신비의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단한 자기갱신과 확장의 예술적 실천이다. 모니터 공간 속에서 완전히 환원되거나 흡수될 수 없는 불확정성의 세계, 의사환경 속에서 변질된 사이버자아(Cyber-self)의 표류의 시선을 통해 오히려 흔들리는 세계를 바라보려 하는 꿈과 카오스의 불안한 이중주 말이다."
이번 전시 전면에 나서고 있는 '돈' 역시 그 자체로 역설이다. '돈'이 우리에게 독려하는 행복한 삶과 돈이 유혹하는 화려한 삶 앞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있음/없음 사이에서, 행복/불행 사이에서 말이다. 그것은 돈이 있음으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 돈이 있음으로 불행할 수 있는 인간 삶의 컨텍스트마저 여실히 드러낸다. 돈이 유혹하는 행복과 화려함 이면에 처절한 지배/피지배의 역사가 반복될 뿐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돈'이 야기하는 '대박'은 언제나 실현성이 희박한 가정일 따름이지만, 간혹 우리의 삶에 들어와 우리의 일상을 훼방한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에게 행복으로부터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을 제공할 뿐이니까 말이다. 이처럼 '대박'은 잔잔한 현대인의 일상 자체에 행복/불행을 가르며 파문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돈'을 위해 오늘도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은 아이러니 자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이 모순, 아이러니, 유희, 풍자, 반서사와 같은 탐 콘레이의 '창조적 역설'의 개념들과 공유하는 것이라면, 이경호의 그것에 대한 재해석과 실천은 다분히 유희적이고, 풍자적이다. 그는 동전이 가득 쌓인 바닥에 물그릇을 하나 놓아두고 있는데 이경호는 그곳에 관객들이 2층으로부터 동전들을 던져 넣게 유도하고 있다. 마치 로마를 찾는 관광객이 트레비 분수(Fontana de Trevi)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처럼, 작가는 이번 전시를 찾는 관객들이 물그릇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서 저마다의 소원을 빌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신이 만든 '돈밭'에 관객들의 유희적 참여를 도모함으로써 돈과 관련한 '역설적 메시지'들이 보다 더 가시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동전 안에 모인 돈들을 따로 모아 시각장애인 단체에 기부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까닭은 그가 1999년 전시 준비 중에 용접 작업을 하다가 눈에 화상을 입어 하루 동안 시각장애인 체험을 본의 아니게 한 경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은, 일련의 관객 참여를 도모하는 유희적 퍼포먼스가 실천되고 있지만, 그의 '창조적 역설'에 대한 재해석과 실천이 마냥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아 보인다는 것에 있다. 그의 작업이 표면적으로 유희, 풍자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그의 작업 안에는 '단단한 뼈 있는 농담과 풍자'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러니, 모순 등이 오버랩되어 있는 슬픈 자조와 '상투적인 단어의 의미'를 비트는 비판적 메시지가 그의 작업 심층에서 지속적으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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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erpts from curator Won-Il Lee’s Creative Paradox Exhibition catalog essay
Kim Sung-ho, Art Critic
Kyung-Ho Lee’s “Creative Paradox” http://www.youtube.com/watch?v=JzH8vV0_sXA
In this exhibition Kyung-Ho Lee reinterprets “creative paradox” through his video and installation works. His work Jackpot!1), as its title indicates, explores this term’s paradoxical import. Lee reveals this work was inspired by the word, “daebak” (Re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would bring “daebak”) referring to the “bonanza” or “jackpot” President Park Geun-hye used in her address to the opening session of the World Economic Forum in Davos, Switzerland in 20132) and the “daebak” he used when talking with his son. Taking note of different uses of the same word “daebak”, the artist asks people what the true meaning of “daebak” is through his work positioned at the two extremes of “mocking problem posing” and “critical introspection”3).
This work consists of two parts: video work giving form to the money image and installation work unveiling the true nature of money. The video work starts with close-up images of a large number of falling coins videotaped with a high-speed camera and played in slow motion. The images appear beautiful and magnificent. The images projected onto the wall with the highest ceiling in the venue bring forth determined, solemn beauty. It is music that makes the slow falling of the coins something more sublime. As if dancing, coins slowly fall with the flow of Caetano Velose’s mellifluous, plaintive song4), Billie Holiday music and pathetic jazz melodies5). The money falling amid songs about human meeting and love is another metaphor for human desire. Like breaking up over and over again, we are in the same relationship with money. As we cannot live without those we love, we also cannot live without money. They both are all indispensable. The video images indicate an overlap of “money, desire, and love” and even the idea of falling in love with money.
In the second half the video, images swiftly develop to the accompaniment of Canan Anderson’s electronic violin melodies.6) A heap of coins perform a circular dance in groups, which is depicted with computer graphics. The performance is very cheerful but displays a spectacle that makes us feel very sorrowful with panoramic video images of horrible events in contemporary world history mixed with the performance. The histories of modern and contemporary empires that rose and fell in glory and shame pass before our eyes with images of kings, queens, and dictators who engraved their likeness on coins, overlapped by images of politicians and artists. There are deplorable historical narratives on the First and Second World War, the Cambodian civil war,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the Arab Revolution, and terrorism in the 20thth and 21stst century. Also included are scenes of UFC martial arts warriors being cheered by spectators, barbarous humors in a predetermined professional wrestling match, and Charles Chaplin’s comic yet gloomy gestures. Neo-liberalism occasioned by money commercializes even miserable history. Like the lyrics of another song by Billie Holiday7), in any age money is like “a strange and bitter crop”9) from the tree with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8). This is like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in paradise, tempting us to take the path of decadence.
Visible under the flow of gloomy, plaintive video scenes, on the floor of the venue, is a heap of ten-won Korean coins, and Taiwanese coins. It is “a mound of money”. While the coins - equivalent to 700,000 won - glitters, lit by lighting, three hydraulic shovels move, making machine sound. There is also a heap of gold-color toy hydraulic shovels. A hydraulic shovel operated by a sensor catching viewer movement commits itself to its duty. It tries to insert coins, but the coins slip from the shovel. It is a metaphor Lee often adopts in his work.10)
An example is one of his previous video installation works11) in which he videotaped a toy hydraulic shovel with a CCTV camera and projected it as an enormous moving shadow on a wall in real-time. In this work a hydraulic shovel reminded viewers of the Korean situation whereas its title Prayer made them realize confronting concepts such as wish/criticism and prayer/resistance as something hybrid. In this work a plaything excavator is a “metaphor” for the ruling class of the time and a “paradox” caricaturing and lampooning critical, resistant messages. That is why the excavator cannot insert a coin: it just makes a thundering noise. In his other work12) displayed at an international art show Lee Won-ill curated the artist has practiced a paradox through a narrative presenting “a contrast between the meaning of time – quick and slow - in the 20th century and the meaning of dream and illusion”13) by contrasting the enlarged projected image of a plaything rollercoaster with the secondhand of a watch. In the catalog essay Lee Won-il interpreted his work Digital Moon, conveying a paradoxical message based on such contrasting narrative, as constant affirmation and negation following “a duet of dream and chaos”.
“Kyung-Ho Lee’s new digital work ------- explores the nonlinear, inexplicable, mysterious area of the self and the world, approaching a flexible intermediate process between modification and silence through digital image processes. It is an artistic practice of constant self-renewal and expansion. It is a disquieting duet of dream and chaos, trying to see a world of uncertainty that cannot be completely reduced or absorbed in a monitor and the shaking world from the floating perspective of cyber-self, denatured in a pseudo-environment.”14)
“Money”, which comes to the fore in this exhibition, is a paradox per se. We are often frustrated by money enabling us to live a happy or resplendent life between have and have-not, fortune and misfortune. Money explicitly unveils a context in human life: we can be happy with money and also unhappy with it. The history of dominance and sub-ordinance repeats under the hidden side of happiness and flamboyance brought by money. “Daebak” is always nothing but a bare possibility, but at times infiltrates our lives and interrupts our everyday. As such, “daebak” creates a stir, drawing a line between fortune and misfortune in contemporary people’s everyday lives. Nevertheless, contemporary humans live for money, which is an irony itself or paradox.
Won-il’ Lee’s “creative paradox” is parallel to Tom Conley’s “creative paradox” referring to contradiction, irony, play, or anti-narrative while Kyung-Ho Lee’s reinterpretation and practice of “creative paradox” is rather playful and satirical. As travelers to Rome toss a coin into the Trevi Fountain to make a wish, Lee has placed a bowl on the floor, inducing viewers to throw coins into it from the second floor. The artist expects that viewers make wishes, tossing coins into the bowl in the exhibition. He seems to have an expectation that their playful engagement more obviously visualizes “paradoxical messages” pertaining to money. He has a plan to donate the coins collected to an organization for the blind15) because he unintentionally had an experience of being blind for one day when he burned his eye while welding in 1999.16)
Crucial to understanding his work is his reinterpretation and practice of “creative paradox” is not always hilarious and delightful despite his playful performance encouraging viewer participation. His work superficially highlights amusement and satire, but brims with “jokes and satire with a hidden, solid meaning”. Sorrowful self-deprecation overlapped with irony and contradiction and critical messages twisting the “import of hackneyed words” are constantly found in the depth of his work.
The Universe in a Bathtub
I discover the universe in a drain-hole in the bathroom.
A myriad of insects proceeding toward white light reflected in the bathroom in search of something –
The unidentified, flamboyant insects seeking something are in contrast with feeble humans
Washing my body, I discover life in the water that is like amniotic fluid.
Where do we live?
Prayer in the tranquil world ----
I save impressive moments I meet by chance in a journey or in everyday life.
I collect documentaries as imaginations, photographs, or things.
Things I overlooked, showed, placed here or there and abandoned touch something in my subconscious.
I envisage space, and form enters in my eyes. What comes next is practice.
The theme is life. Numerous stories derive from life and death, beginning and end. As I will remain incomplete even in the moment of my death, I do not know what the correct answer is. Answers change at every moment due to my action.
If I have lived for momentary objectives and immediate results, what matters now is for what and whom I have to live this dew-like life. The indicator of life, spiritual frequency, means for communication among people, setting the range of feeling, a challenge to capture light --------- As moths fly into light, we humans proceed to achromatic light. |
August 25, 2006
I look for solutions through children.
Our futures that were my past -----
Waiting, passing, realizing, and reviving ----
Peter Handke’s Song of Childhood hovers.
``우리 시대의 美를 논한다`` 중 발췌
이경호의 작품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겠다. 이경호의 ‘디지탈문’의 경우에는 관람객의 존재는 작품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비로소 작동하는 순간은 관객이 이 작품을 만지는 순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면과 카메라 사이의 허공을 무언가가 스치는 순간이 비로소 작품이 완결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카메라에 비친 관람객의 손의 이미지와 프로젝터를 통해서 벽에 투사되는 이미지의 무한 피드백이다. 이 경우에 관람객이 보는 이미지는 자신의 손이면서, 동시에 달이고, 실제로는 카메라와 벽이 만들어낸 무한 반복의 순환 구조이다. 이것 역시 자연의 순환구조를 그대로 차영하고 있으나, 이 경우에는 그 구조가 작품의 전면에 형상화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형상은 허상이라고 할 만한 둥그런 영상, 즉 작가가 디지털 문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런 허상의 형상화는 달빛 소나타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카메라는 뻥튀기 기계를 비추고, 뻥튀기 기계는 달덩어리 같은 뻥튀기를 튀겨낸다. 뻥튀기 기계가 내는 소리는 작가에 의해서 소나타로 이름 붙여진다. 관객은 뻥튀기 기계가 연주하는 소나타를 들으며 달의 대량 생산 과정을 확대 촬영한 영상을 비디오카메라와 프로젝터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감상하게 된다. 비단 뻥튀기 기계의 숨겨진 의미를 연상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노골적으로 구체제의 미학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은 능청맞게 달빛소나타일 뿐이라고 서정적으로 ‘뻥’을 친다. 역시 이런 일련의 감상도 그 현장에 참여한 감상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경호는 이 ‘달빛소나타’를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했을 때는 관람객이 프라다 봉지에 뻥튀기를 가져갈 수 있게 하기도 했다.
-미디어 작가, 미술평론가 박 진 호-
교수신문 지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아방가르드 로맨틱
박 진 호
(화가, 비디오 아티스트)
아방가르드 로맨틱 이경호를 소개한다.
낭만적인 전위예술가라고 해도 뜻이 통할 것을 굳이 ‘아방가르드 로맨틱’이라고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전위예술가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가? 벌거벗고, 소리를 지르고, 붉은 물감 혹은 피를 뿌리고, 광기의 음악, 광기의 북, 뛰고 소리치고, 발광을 하는 이미지가 우선 떠오를 것이다. 좋게 말해서 전위예술가고 나쁘게 말하자면 예술깡패다. 이경호도 어려서 숱하게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 기타와 텔레비전을 부쉈다. 이런 면에서만 보자면 웬만한 전위보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이 없는 배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로맨틱이라는 수사를 방점 두 서너 개 찍어가며 붙여 부르는 이유는, 그가 사랑했고 또, 지금 사랑하는 것이 커더란 예술지상주의의 고함소리보다는 인간에 대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2006년 4월 갤러리 <세줄>에서 이경호의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여행자. 이경호는 늘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경호가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전위적이다. 특히 매체를 다루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매체를 다룬다는 것은 매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람이 백남준이다. 백남준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아노를 어떻게 하면 더 잘 다루어 좋은 혹은 다른 음악을 하는가를 생각할 때 그것을 때려 부수는 소리도 듣기 좋다는 것을 보여준 작가다. 백남준은 예술가들의 첨단 매체에 대한 고포를 치료한 사람이다. TV로 조각을 하건 컴퓨터로 축구를 하건 아무 문제될 게 없다. 이경호는 그런 관점에서 백남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 백남준에게 바치는 작품이 바로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백남준 선생님을 기리며」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올해 쏟아져 나온 수많은 백남준에게 바치는 작품들 중 당연 열 손가락 중에 하나로 꼽힐 만한 작품이다.
어둠 속에 조명 하나가 러닝머신을 비추고 있다. 러닝머신 위엔 고물 바이올린 한 대가 질질 끌려가고 있다. 바이올린이 러닝머신의 고무판에 끌리며 낮은 소리를 낸다.
1961년 뉴욕 브루클린 거리에서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줄로 매달아 끌고 다녔던 퍼포먼스「땅에 끌리는 바이올린」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학생시절 처음으로 한 미술작업이 아끼던 기타에 물감을 채워놓고 TV를 부수는 퍼포먼스였다”는 작가는 존경하는 백남준과 그 퍼포먼스에 대한 오마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백남준 대신 바이올린을 끌고 가는 러닝머신은 더 이상 세상에 없는 백남준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또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일상에 끌려 다니는 우리의 모습은 항상 같은 속도로 입력되어 있는 러닝머신 위의 바이올린과 겹쳐지면서, 바이올린이 끌리며 내는 ‘끽끽~’ 소리는 일상의 노곤함에 지르는 우리의 한숨과 비명 같다. 게다가 복잡한 이론과 개념을 덧입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너무 무거워져 버린 ‘현대 미술의 살을 빼자’는 익살까지 담아 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재담가 중에 한 사람인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를 마무리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경호는 ‘여행자’를 주제로 이렇듯 러닝머신, 바이올린, 빈 비닐봉투, 버려진 포장마차, 포클레인 등을 가지고 이경호의 주제인 ‘인생’을 이야기한다.
인간 이경호가 인생에 대해 느끼는 것은 작가 이경호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실험적인 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비현실적일 정도로 소시민적이다. 다만 필자가 이경호의 일련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런 소시민적인 아이디어를 나름대로 첨단매체라고 하는 비디오 작업과 설치작업을 통해서 구현하는 것, 또 그 구현의 과정에서 비디오카메라와 프로젝터, 오브제 등을 이용하는 방식이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하여 삶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경지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경호가 매체를 다루는 방식은 일견 매우 즉물적이고 즉각적이어서 쉽고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를 아우르고 조율하는 이경호의 연출력에 힘입어 관객은 순간순간 아하 하고 무릎을 치는 경탄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의 작품은 크게 비디오 설치 4작품으로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한 백남준을 추모하여 만든 「백남준을 기리며...」같은 공간에 놓여진 「버려진 시간들」이층에 전시된 「여행자」, 그리고 「풍경」.
그 중「버려진 시간들」은 불시에 마주치게 되는 풍경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자동문이 열리는 짧은 순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거울 속의 관상동맥은, 2년 동안 버려져 있던 포장마차를 휘감은 나뭇가지로 변화하고, 다시 그 장소에 머물렀던 자들의 그림자로, 기억들로 연결된다.
작가는 전시장의 여러 가지 요소-2년간 방치된 포장마차, 노숙자들의 모습, 포장마차에 비친 취객들의 그림자 영상과 음향, 잡음과 함께 우연히 맞춰진 주파수로 기독교방송이 나오는 작은 라디오, 옛날 화장실 등으로 사용 되었을 법한 작은 붉은 등, 작가의 심장 주변을 관상동맥 조영술로 촬영한 영상-등을 공간 연출하듯 배치시켜 놓았다.
작가는 이 전시를 준비하던 중 심각한 심장질환을 발견하여 전시 시작 이틀 전에 심장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를 준비하던 기간이 곧 수술을 준비하던 기간이었고, 자연히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작업을 하게 된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마치 유서를 써내려가듯 마지막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전시를 준비했다고 하니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던 심상찮은 느낌은 그것에 연유한 것이리라. 이런 점이 항상 일정 정도의 유머러스한 요소를 끌어내던 이경호의 종전에 작품들에 비해 증후하게 느껴졌던 이유이리라.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에서도 웃음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었지만, 즐거워 웃는 웃음이라기보다 페이소스가 담긴 미소로 느껴진다.
2층의 전시는 이경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눈을 잡아끄는 것은 이경호의 신작인「풍경」. 이 작품은 이경호의 최근의 대표작인 광주비엔날레의 「달빛소나타」와 연결선상에 있는 작품이다.「달빛소나타」에 대한 유진상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경호가 사용하는 비디오 영사기의 증감효과는 피드백 프로세스와는 또 다른 극적 무대를 만들어낸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한 「달빛소나타」에서 그는 달의 원형을 떠올리는 ‘뻥튀기’를 수없이 많이 만들었다. 자동으로 쌀이 공급되는 뻥튀기 기계가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여준 이 작품은 한 무더기로 쌓여진 뻥튀기를 관객이 먹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층적인 의미생산을 이루어내고 있다. 앞의 작업「카오스」와의 연속선상에서 읽히도록 만든 이 작품은 마치 기계가 달을 찍어내는 듯한 유비와 ‘뻥’ 하면서 튀겨지는 파열음의 극적 효과, 그리고 그것을 먹는다는 행위가 연상시키는 종교적 함의-카톨릭의 영성체-혹은 에로티시즘-관객의 신체를 먹는 행위에 개입시킨다는 의미에서- 때문에 현장에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작가는 감시카메라를 쌀을 누르는 프레스에 근접시켜 촬영하고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비디오 영사기를 이용하여 다시 커다랗게 투영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극대화했다. 비디오 장치의 현재성과 오래된 기계장치의 현재성을 경쟁시키는 이원성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사찰의 타종을 떠올리는 뻥튀기 기계의 반복적인 굉음이 현재에 대한 자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튕겨 나오는 것은 역시 원형으로 수북하게 소진되어 쌓여가는 현재의 잔해들이다. 퍼포먼스가 강한 현재진행형이라면 그것의 조각적 표현은 현재를 사물의 형태로 끊임없이 찍어내고 관객이 직접 그것을 먹으며 소진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경호의 오래된 기억들」중에서
여기에 이경호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뻥(달)님에게!!! 어렸을 적 달을 닮은 뻥튀기는 나에게 작가적 영감을 가장 많이 준 먹거리 과자였습니다. 역사가 삼사십년 된다고 하니 저와 나이가 거의 비슷합니다. 이런 모양 저런 형태를 입으로 먹고 자르면서 또는 손으로 잘라서 침으로 녹이며 달에다 대어보기도 하고선 여러 형태의 다양한 조각을 만들어 냈습니다. 달이 뜬 밤이면 어머니는 장독대가 있는 대안으로 올라가 정안수에 달을 띄워 놓고 군대 간 형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하셨습니다. 또 뻥 과자는 제가 어릴 때 성당 미사 시간에 나누워 주던 밀떡과도 닮았습니다. 다빈치의「최후의 만찬」을 생각하면서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곧 배가 고팠습니다. 미사 전 몇 시간은 공복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밀떡이 뻥 과자로 보였습니다. 사라의 빵! 믿는 사람이건 아니건 사랑으로서 서로를 대하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죠, 저도 가끔 가슴을 칩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의 빵을 나누어드립니다. 전쟁의 폭탄소리가 아니라 평화의 뻥 소리 어릴 적 낭만과 꿈과 사랑을 뻥 소리와 함께 가져가십시오. 이라크로 파병하는 자이툰 부대가 포 쏘는 훈련대신 뻥 과자 튀기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을 신문 지면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무척 반가운 기사였죠. 실력 없고 정신 나간 타 구단 축구감독의 요청으로 가족들의 끼니 걱정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주전자 담당 용병 후보들의 모습들처럼 약간은 처량하기도 하면서 아름다웠습니다. 미디어가 뻥만 늘어놓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선택한 패션쇼에서 가끔 쓰이는 단조 음악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돌면서 뻥이 터질 땐 묘한 감정이 듭니다. 우리들 인생 같기도 하고 미래의 기계적인 인간복제의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면서, 처량하게 쌀이 고압에 연기를 내면서 터져 나오는 뻥들의 쌓인 형태는 널브러진 시체들의 무덤 같기도 하였습니다. 새삼 광주에 고개를 숙입니다. 이 작업은 프라다와 저의 공동 작업입니다. 이름 레벨이 없는 프라다의 가방은 저의 뻥 과자와 동급입니다. 프라다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무인도에 뻥 과자와 프라다 가방이 있다면 우리는 뻥 과자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문득 어릴 때 먹을 것을 가지고 누나와 싸운 기억이 납니다. 모든 전쟁도 결국엔 먹을 것 때문에 생깁니다. 서로 잘 적당히 나누어 먹고 살면 좋겠습니다. 내가 더 잘 먹으려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뻥 과자는 관자로 드셔도 되고 작품으로 보관 하셔도 됩니다.
p.s: 올 초 우연히 총신대 앞의 약속장소에서 이 뻥 기계를 만났습니다. 세상에 그냥 우연은 없나 봅니다. 첫 만남에 전기가 왔습니다. 우리의 매순간의 선택과 결정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예술은 진짜 발견하는 것일까요? 우연이 과연 우연일 뿐일까요?
2004년 7월 7일 이경호 드림
-「광주비엔날레를 위한 이경호의 작가노트」중에서
비평가 혹은 전문가들이 그의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과 실제 그가 그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극적으로 다르다. 바로 이 지점이 필자가 이경호를 아방가르드 로맨틱이라고 부르는 지점이다. 이경호의 시선은 그의 작가노트에서 보듯이 줄기차게 우리네 삶에 집중해 있으나, 그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다분히 실험적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용어 정리를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미술사조는 낭만적인 미술이라는 관습적인 해석으로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들라크루와의 그림이나 제리코의 그림을 단 한 점이라도 본 사람은 그 그림들이 관습적인 의미로 낭만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여기서 같은 그림을 놓고 로마주의 그림이라고 설명해보자.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미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아셨을 것이다. 낭만주의의 원래 명칭은 로마주의다.
혼란과 혼돈속에서 견인되는 각성의 프로젝션 이 원 일
(2007 ZKM 아시아 현대미술전 총감독) 이경호는
최근 오브제를 프로젝션으로 투영하여 극적인 시간, 공간의 증식을 통해 전시공간을 형이상학적인 메타픽션의
공간으로 진화시키는 설치작업을 선보여왔다. 이번 ‘No-Signal’
작업은 그가 필자와 함께 광주비엔날레, 타이페이 MOCA, 상하이
비엔날레 등 국제무대에서 선보였던 일련의 프로젝션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금년 6월 독일 ZKM 아시아 현대미술전에 출품할 작품을 미리 국내에 선보이는 보고전의 성격을 갖는다. ‘No-Signal’은 작가가 태어나서 교육받고 유학한 후 현재까지의 생을 영위해 온 아시아 속의 한국인으로서의
역사의식과 삶에 대한 성찰이 농축되어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필자의 눈에 비치는 설치공간은
찰리 채플린의 시계였던 ‘모던 타임즈’의 실존적 위기의식에서 모더니즘 (서구, 비서구의 모더니티)의 ‘일방통행’을 거쳐 예술의 자기목적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 까지를 암시하는 ‘부재’, ‘고갈’, ‘소진’, ‘공허함’의 막다른 골목을 응시하게 한다. 아니 어쩌면 그의 벽면에
확대 프로젝션되어 흘러가고 있는 시간은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린 시간에서 오늘 그의 삶의 실낱 같은 ‘희망’의 시간까지를 관통하는 ‘20세기’ 자체의 애처로운 프로젝션의 총체극일지도 모른다. 힘겹게
끌어올려지는 구슬과 덜그럭거리는 장난감 동력장치, 그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굉음으로 순환하는 놀이동산의
오브제 구조물은 허무한 20세기 문명의 피로감을 공허하게 투영하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이 언급한 바와 같은 ‘문지방에 선’ 시간이요, 매슈
아놀드가 지적한 ‘한 세계는 이미 사멸되고 다른 세계는 아직 새로이 태어나기에는 무력한’ 21세의 고뇌와
후회, 불길함의 호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경호는 ‘No-Signal’을 명명하며 가끔 인생의 전원을 ‘끄고(Signal off)’
싶다는 충동을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프로젝터를
생명장치로 비유할 때 ‘No-Signal’은 동공의 변화 없음과 같은 모니터의 무반응, 생명의 멈춤, 곧 시간의 정지를 의미한다. 그렇게
이경호의 개념적 서사구조는 무거운 미장센의 연출과 비장감을 더하는 음향효과를 통해 비극적 상실감을 일차적으로 보게 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연출이 시인 보들레르와 같은 허무주의의 늪에서 종료되지는 않는 일말의 단서는 ‘No-Signal’에서
또다시 ‘Signal on (재생)’을 꿈꾸는 실낱 같은
소망에 있을 것이다. 그의 프로젝션 화면 속에서 영화 ‘자이언트’의 저녁 노을 속의 석유시추동력장치를
연상시키는 노스텔지어가 마르크스의 유토피아적 건설의 역사주의, 프로이트의 금욕적 독재주의와 중첩되는
중층적 이미지들로 오버랩될 때, 필자는 그곳에서 작가의 간절한 소망이 모더니티를 관통해 온 고유한 ‘합리성’을
힘겹게 가격하고 있으며, 눈앞으로 굴러 떨어지는 구슬 이미지가 허무한 행동주의를 연상시키며 권위와 중심에
대한 갈망을 지워대고 있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현재’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함께 굴러 떨어짐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실제세계 (장난감)와
창조된 세계 (시뮬라크라적 허구, 상상적 시공간)의 경쟁적, 순차적 대비가 현재적 시간의 끝없는 자기반영으로 메타픽션화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난감 오브제들의 유희적 요소에서 출발한 중층적 이미지 작동시스템은 노스텔지어와 초자연적 에너지, 문명의
거대함, 헤겔류의 압도적 서브라임 (Sublime)을 종횡무진
왕래하는 극도의 혼돈과 혼란의 ‘몽환적’ 미장센의 무대를 연출하며, 결국 현재라는 실시간 (real-time)을 각성(skepticism)과 재고의 시간으로
끝없이 되감으며 그것을 허무한 영원으로 순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 Lee Kyung-ho’s
Projection to Lead to Awakening in Confusion and Chaos
By
Wonil Rhee, General Director of ZKM
Contemporary Asian Art Festival
Artist
Lee Kyung-ho has recently presented a series of installations that transform an
exhibit venue into a metaphysical, metafictional space by enlarging its time
and space through the projection of objects. A group of artworks titled
No-Signal are an extension of a series of the pieces exhibited at the
Gwangju Biennale, the Taipei Museum of Contemporary Art exhibition, and the
Shanghai Biennale. They will be also previously presented in
The
work No-Signal is a condensed representation of Lee’s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life as a Korean artist within
Feelings
of emptiness and fatigue caused by the 20th civilizations are reflected in his
rattling plaything-like power equipment and the amusement park rides
circulating in a thundering noise. As Mikhail Bakhtin mentioned, Lee’s work
probably represents the ‘time on the threshold’ and anguish, repentance, and
inauspiciousness of the 21st century, the period when one world comes to an end
and that is too languid to expect the birth of a new world, as Mathew Arnold
pointed out. So, Lee Kyung-ho utters like a monologue his impulse to ‘signal
off’ the power of his life.
If
the projector is a metaphor for a life-support system, No-Signal means
no change of the pupils, no response of monitors, and the pause of life, namely
time. Lee’s conceptual narrative structure represents a sense of tragic loss
through its heavy-hearted mise-en-scene and pathetic sound effect. There is an indication;
however that Lee’s rendition would not fall into any nihilism, as did poet
Baudelaire.
Lee’s
canvas shows the overlap of nostalgia depicted in the film “Giant,’ Mark’s
utopian historicism, and Freudian ascetic totalitarianism. The artist at this
point shatters the belief of inherent rationality. At this point, the contrast
between a real world (playthings) and a created one (false images as the
simulacra and imaginary time and space) becomes metafictionalized through en
endless self-reflection of time.
Accordingly,
Lee’s multiple image working system presents the state of extremely confused,
chaotic, and even ‘hypnotic’ mise-en-scene in which nostalgia, supernatural
energy, grandiose of civilization, and the sublime Hegelian thinkers defines
are blended together. As a result, his system demonstrates the cycle of
real-time skepticism and reconsideration.
In the West, philosophical analyses of
Asian culture often stop at labels such as Buddhist, Confucian, Zen,
naturalist, and other generalities. These labels are too pat and opportunistic,
however, to have any hope of applying to the East, for they put politics and
religion in the same basket and ignore the many historical events in which the
gap between the two was impassable. This abusive type of simplification
generates polarizing contradictions that are no different from those arising
when one labels the West as Christian or steeped in Greek classicism or
adhering to Darwinist evolutionary principles. Similar labels that seek to
explain differences between East and West have appeared in the visual arts.
Confrontational concepts and historical dualities that try to elucidate East
and West polarities are also ineffective. Two cases in point are the Korean artists
Kim Haesook and Lee Kyungho, in whose work it would be impossible to find the
so-called Asian sublime or spirit of contemplation. Instead, they look at the
pleasure and pain born of capitalism and the information age, but with a
sadder, more violent edge than what Western sensibility is used to seeing.
Their aesthetic language, which underlines our ignorance, misbehavior, and
materialism, suggests that we live a more spiritual life, much like proposing
that we do ornithological research instead of merely gaping at the beautiful
flight of birds in the sky. Kim creates art from animal skins that
exist to satisfy our desire to make ourselves and our surroundings seem more
beautiful. Rarely do we consider that the skins are the remains of what were
once living creatures. To these skins the artist tacks on our vain
self-deceptions and money making, the result of which is an obstinate take on vivisection
(the dissection of a living organism). In the exhibition space Kim has created an
installation of the skins taken from three dead crocodiles, whose bloodthirsty
instincts when they were alive are matched by those of man. The skins of the
three beasts seem to be crawling with difficulty toward Bodhidharma, who is
their savior from having been skinned to death. The crocodile skins’ mouths are
probably filled with bad karma and the debts they must pay for their savage
conduct in former lives. The artist has positioned the dry, stiff skins so that
they appear to plead for salvation. In this work the sad shell of a being once
alive and now, in death, finally returned to its essence dominates the space in
its encounter with the many exhibition visitors. Lee Kyungho has a wonderful knack for
transforming hopeless science and technology into art. He seems to believe that
for technology to become art, science and poetry must absolutely intervene. He
uses new media to create poetic images that the spectator most often completes,
and stages the sad refrain of constant ear-shattering noise heard in so many
places in modern society. In his digital video images of beautiful
moonlight the artist suggests that today’s rich technology and scientific
applications function like yesterday’s paintbrush. Lee created monumental works for the 2004
Gwangju Biennale and the 2006 Shanghai Biennale. One was a very old cookie
maker that made one cookie every 30 seconds, which the artist offered to a
spectator – either to eat on the spot or to take away in a plastic cookie bag
designed by Miuccia Prada – the very same of Prada fame. The other work
consisted of 50 mini excavators that dug up the wooden floor for the duration
of the biennale. The noise in the exhibition space, day after day, was
terrible, like a desperate cry for society to wake up from a technological
nightmare. The metaphorical and satirical works of Kim
Haesook and Lee Kyungho exploit a visual language that is ostentatious and
passionate, in a style synched with the zeitgeist of contemporary art. Their
work is a master class on how art can speak plainly about community and engage
the spectator in a satisfying dialogue. Yongwoo Lee 이경호의 오래된 기억들 유비, 각성적
순간 등의 관념들이 순차적으로 정돈되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비디오 장치를 이들
개념들의 의미관계 속에서 재배치하는 과정은 눈여겨 볼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에피소드 속에서 백남준을 거론하는 부분도 흥미롭게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비디오가 아니라 퍼포먼스라는 영역에서 백남준을 동경했다는 고백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백남준을 알기전 처음으로 학생 시절에 그가 한 작업은 그가 아끼던 기타를 물감으로 채워놓고 부수는,
플룩서스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퍼포먼스가 집약하는 현재적 순간들의
부각과 그것을 위한 극적 공간은 그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백남준에게 바치는 헌정인 <백남준 선생을 기리며>,
즉 런닝 머신 위에서 끝없이 끌려가는 바이올린은 그가 자신의 스타일로 해석한 흥미로운 백남준에 대한 기억으로서, 한동안 감상할만한 작품이다 .
Old memories by Kyung Ho Lee
One of the best
things about video devices is that you can actually walk into the space where
performance is taking place. Merce Cunningham and Twyla Tharp were
among the dancers who from the beginning demonstrated how videos can be the eye
that moves around in the space occupied by the dancer. The concept
of moving eye along with the ever-so-light camera devices and
separation of its system have accelerated the growth of performance, i.e. one
of the factors in performing arts, not to mention stage that props up the
performance has evolved to become an omnipresent eye device rather than just a
target for the eye. An eye can work anywhere. What an eye tells us
goes beyond the stare projected on an object to indicate the meaning of where
the object physically belongs. The use of video device creates an
art with a question of how the place for the observer and the place for the
observed, a new implication on space, is established.
"Chaos
under Dream"“꿈과
카오스의 이중주 끝없는 긍정과 부정” 2002 Rhee Won-il (Media-City Seoul 2002,
Artistic Director)
" 리 장군 "
"Lee, en général."
계원조형예술대학/ 미술비평 유진상
비디오 장치가 지니고 있는 탁월한 점 가운데 하나는 퍼포먼스의 공간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스
커닝햄이나 트와일러 타프(Twyla Tharp) 같은 이들은 처음부터 비디오가 춤을 추는 신체가 점유하는
공간 속을 이동하는 시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무용가들이다. 시선의 유동성에
대한 의식이 카메라의 경량화와 시스템의 독립에 의해 퍼포먼스, 즉 공연적 요소의 증식을 가속화하였다면
그것을 떠받치는 무대 역시 시선의 과녁이 아닌 편재적(omnipresent) 시선장치로 진화했다. 눈은 어디에서든지 뜨여질 수 있다. 눈이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대상에의 응시를 넘어서서 그것의 위치가 지닌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디오
장치의 사용은 공간에 새로운 함축, 즉 바라보는 것의 위치와 보여지는 것의 위치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에
대한 미술을 만들어낸다.
다른 한편 비디오 영사기의 활용은 현재의 무대화, 그것의 증감, 시선의 편재에 준하는 극적 공간의 편재라는 새로운 범주의 연출적 요소들을 만들어냈다. 현재의 무대화란, 실시간으로 기록된 것을 재생하는
비디오 영사기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카메라의 감시장치로서의 기능과 직결된다. 카메라와 직접 연결되어 투영된 이미지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재생된 것이지만 그것은 현재로
간주된다. 기록/재생의 과정이 인식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는, 즉 실시간(real-time)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비디오 장치가 지니는 매우 중요한 특이성이기도 하다. 이경호의
작품 <디지털 문>는 피드백 프로세스, 즉 비디오의 실시간 기록-재생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차의
현상을 이용한 작품이다. 주로 카메라에 연결된
TV화면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자주 활용되던 이 현상은 이경호의 경우에는 비디오 영사기에 의해 흰 벽 위에 투영된 빛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단순히 TV화면과 비디오
영사기에 의해 비추어진 빛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는 중요한 전환을 일으킨다. 카메라에
연결된 비디오 영사기가 투사하는 빛은 주변의 광량과 움직임에 따라 조절 가능한 빛의 얼룩으로 형성되면서 모니터의 사각형 안이 아닌 실제 공간의
연속성(continuum) 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경호가
만들어내는 둥근 원형의 빛은 조정된 구체적 형태라는 점에서 사물과 다름이 없으며, 이런 점에서 조각적인
형식을 띤다.
<디지털 문>는 조각적 양방향성과 시적 연출을 통해 공간을 두 개의 현재적 레이어로
만든다. 하나는 현재를 수없이 많은 원형의 단면들로 가시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를 ‘달’이라는 구체적 대상으로 명명함으로써 연극적 소격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현재는 공간 위를 떠도는 현재적 단면들의 연속으로 지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들이 직접 만지고 변형시키며, 때로는
공간 속에 파편화시킬 수 있는 사물이기도 한 것이다. 비디오 장치가 허용하는 시선의
유동성은 피드백 프로세스에 있어서는 장치 자체의 유동성으로 바뀐다. 그것은 장치의
위치를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일직선상에 고정시킴으로써 내파(內波) 혹은
내파(內破)를 일으키는 것이다. 내파의
응결된 형태인 원형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외부로부터의 개입에 대해 때로는 예민하고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한 형태로 반응한다.
이경호가 사용하는 비디오 영사기의 증감효과는 피드백 프로세스와는 또 다른 극적 무대를 만들어낸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한 <달빛 소나타>에서 그는
달의 원형을 떠올리는 ‘뻥튀기’를 수없이 많이 만들었다. 자동으로 쌀이 공급되는 뻥튀기 기계가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여준
이 작품은 한 무더기로 쌓여진 뻥튀기를 관객이 먹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층적인 의미생산을 이루어내고 있다.
앞의 작업 <카오스>와의 연속선상에서
읽히도록 만든 이 작품은 마치 기계가 달을 찍어내는 듯한 유비와 ‘뻥’하면서
튀겨지는 파열음의 극적 효과, 그리고 그것을 먹는다는 행위가 연상시키는 종교적 함의 -카톨릭의 영성체- 혹은 에로티시즘
-관객의 신체를 먹는 행위에 개입시킨다는 의미에서- 때문에 현장에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작가는 감시카메라를 쌀을 누르는
프레스에 근접시켜 촬영하고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비디오 영사기를 이용하여 다시 커다랗게 투영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극대화했다. 비디오 장치의 현재성과 오래된 기계장치의 현재성을 경쟁시키는 이원성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사찰의 타종을 떠올리는 뻥튀기 기계의 반복적인 굉음이 현재에 대한 자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튕겨 나오는 것은 역시 원형으로 수북하게 소진되어 쌓여가는 현재의 잔해들이다. 퍼포먼스가
강한 현재진행형이라면 그것의 조각적 표현은 현재를 사물의 형태로 끊임없이 찍어내고 관객이 직접 그것을 먹으며 소진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비디오 장치에서 출발하여 기계를 이용한 조각장치에 이르는 이경호의 작업과정은 그다지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필연적인 전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가
개입하는 극적 공간에 비디오 장치를 연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과관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결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그다지 낙관적으로만 말할 수는 없다. 백남준
이래로 많은 비디오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의 가능성들을 실험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가지는 비디오와 신체의 이항(dichotomy)이 지니는 전형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찍는 비디오의 대부분은 신체를 향해 겨누어진 것들이다. 퍼포먼스와 기록의
과정은 사실상 비디오가 개념적인 소멸을 겪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발전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더 이상 비디오 장치에 대한 자기지시적이고 개념적인 퍼포먼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퍼포먼스로 출발한 비디오 기록과정이 작품들의 계열적 진화의 과정에서 개념적 서사로 전개되는 방식일 것이다. 즉 카메라와 비디오 영사기의 연결에서 파생된 실시간 프로세스가 기계적 반복을 통해 파생되는
사물과 그것의 현재적 경험에 의해 역으로 지시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수많은 장난감 포크레인과 불도저들을 모아 작동시켜 놓은 <풍경>은 키네틱(kinetic) 오브제들과 감시카메라 그리고 비디오
영사기, 조명 등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앞서의 <달빛
소나타>와 연결되는 작품이다. 퍼포먼스를
통한 현재적 진행이 기계적 과정으로 대치되는 것도 연속성을 띠고 있다. 이 작품은
카메라와 영사기의 개수를 늘리면서 극적 공간을 증식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편재성이 강조되어 있다. 장
팅겔리(Jean Tinguely)를 연상시키는 그림자 놀이와 실시간 비디오 영상이 동시에 진행되고, 그 위에 모터들의 소음이 증폭되어 있어 원근이 서로 다른 계열에 따라 병치되어 있는 것도 앞서의 작품에서 사용한
증감효과를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다. 이 작품은
<카오스>와 함께 전시되는 것으로 다소 형이상학적인 ‘달’의 풍경과 대구(對句)를
이루면서 지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설치작업 전체는 <여행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퍼포먼스
작가로서 미술을 늦게 시작한 이경호에게 있어 처음으로 자신이 창작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느끼기 시작하던 시기와 연관되지 않을까 한다. 현재가 떠올리는 복합적인 관념들과 지상의 풍경, 여행자가
경험하는 끊임없는 풍경의 경과 등이 이 총체극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카메라의 위치를 아주 낮은 곳에 위치시킴으로써 피사체를 증폭시키면서 동시에 기록된 이미지를 역시 낮게 위치한 비디오 영사기를 통해 벽에
투영하는데, 이때 비디오 영사기는 이미지를 투영함과 동시에 또 다시 피사체의 그림자를 생성시키는 조명장치, 즉 광원으로 기능한다. 대상의 이미지와 그것의
그림자를 동시에 생성시키는 장치로 비디오 영사기를 사용하는 것은 앞서 <카오스>에서 비디오의 자기지시적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되었던 피드백 이미지와 유비를 이룬다. 여기서도 두 개의 영상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생성되는 동일한 현재의 두 가지 양상이다. 움직이는 포크레인의 그림자와 영상들이 무수히 겹쳐지는 벽면의 혼란스러운 소요(騷擾)로 인해 관객들은 현재의 흐름과 그것의 차이들을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맞은편에 투영되어 있는 ‘달’은 본래의 개념적 착안점들이 어디에 있는지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약간의 유머를 보탠, 이 풍경들
위를 날아다니는 우주소년 아톰을 보고 있노라면 ‘원자’라는
이름의 이 캐릭터가 전체의 풍경에 부여하는 미분적 차이의 스케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비트’가 아니라 아톰인 것도 말이다.
이경호의 퍼포먼서(performancer)로서의 배경은 간혹 그의 작품에 있어 몇 가지를
놓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표현적인 작업방식이라거나 단순한 오브제의 차용, 소음 등은 그의 작품을 격정적이고 감성적인 내용으로 이해하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펴본 일련의 작품들의 전개과정 속에는 현재성, 이항,
차이 혹은 차연(差延),
by
art critic Yoo jin sang
The use of video device on the other hand has created the staging of presence,
its growth, and an omnipresence of dramatic space which is a new category of
dramatic factors that equals to the omnipresent eye. The staging of
presence is its ability for a video camera to play what it has recorded real
time basis, and this is in direct contact with its function as a surveillance
device. An image reflected in direct connection with camera has as little time
difference and is considered as the present. This state
called real-time where recording and playing are considered no
separate process is a very important uniqueness that video devices
possess. Kyung Ho Lee's <Digital Moon> adapted a feedback
process, the state where time difference occurs when real-time video recording
and playing proceed. It mainly recorded what was reflected on monitor that was
hooked onto camera and is now altered by Kyung Ho Lee to record the light that
the video projector reflects on white wall. This calls for a change that is
more than the simple difference in lights each reflected by TV monitor and
video projector. It is because the light shed by the video projector of the
camera forms a patch of light that can be controlled by the amount of light
around it and its movement, and appears not in the rectangle of the monitor but
in the continuum of the real space. This round circle of light made by Kyung Ho
Lee is no different from an object in a sense that his light is a controlled
concreteness, and therefore takes sculptural formality.
<Digital Moon> makes space two existing layers through sculptural
bilateralness and poetic dramatization. One visualize the present into a sight
full of slices of circle and the other draws the present onto the stage of
dramatic alienation by giving it a concreteness by calling it
'moon'. The present is perceived as the continuum of phases that
wander around the surface of space. This then becomes an object that the
audience gets in direct contact with, touches, and from time to time fragmentizes.
The moving eye whose existence the video device allows is changed into the
moveability of the device itself in feedback process. This juxtaposes the place
where the device is in line with the image it creates, and produces inner wave
or inner swing. The circle in the form of solidified inner wave or swing reacts
to the ubiquitous outer interruption in a very sensitive and soft, and
sometimes in a very vigorous way.
The fluctuation effect of video projector that Kyung Ho Lee uses creates a dramatic
stage that is different form that of feedback process. In 2004 Kwangjoo
Biennale, his <Moonlight Sonata> displayed hundreds of 'popped rice' that
reminded us of the prototype of moon. <Moonlight Sonata> projected a
real-time image of a machine with an automatic supply of rice popping rice and
offered the popped rice to the audience to eat creating layers of meaning.
This, which should be read in continuation of <Digital Moon> mentioned
earlier, creates an atmosphere full of fantasies of moon being mass produced by
a machine, of dramatic pops and bangs as rice is popped, and of the religious
implication of eating the holy creation, Catholic Holy Communion or eroticism
since the audience is physically involved in eating, and therefore we say this
work isnot short in any of immersing the audience. In this work again, Lee got
the closest shot possible of one part of machine where rice is pressed with his
camera, and maximized the dramatic effect by projecting the already enlarged
image even larger. Here again is the duality which puts the present of video
device and old mechanical device in constant dual. The repeated pops and bangs
that reminds us of the religious sound of a gongforces the perception of
present, and what's popped out the machine which accumulates in a circular form
is also the residue of present. His performance is a firm present tense where
its sculptural expression without ceasing imprints present in the form of an
object which is then exhausted by the audience who snacks on it.
Kyung Ho Lee's work process where he started with performances using a video
device and then proceeded to a sculptural installation using machines is not
exceptional. In a way it was an inevitable proceeding. Since it is only natural
to install a video device in a space full of drama where bodies interfere. It
is in fact not easy to hold an optimistic view as to where this kind of
connection is going to head. Not only because Namjun Pak and his followers
exhausted almost all the possibilities, but also because the dichotomy of video
and the body possesses a prototype. Almost all the videos we record in every
day life are aimed at the body. Performance and its recording process in fact
head in the direction of conceptual extinction. This proceeding in a productive
direction will not mean self-directional and conceptual performance of video
device any more. That is an object created by the mechanical repetition of real
time process of the camera and video projector collaboration, and
its present interaction produce the process in the opposite direction.
“꿈과 카오스의 이중주 끝없는 긍정과 부정”
이원일 (미디어 시티 서울 전시총감독)
작가 이경호가 꿈꾸고 있는 세계는 불확정성의 세계다. 이는 혼돈 속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현상과 같다. 그의 예술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를 복잡계의 눈으로 직시하고자 하며 합리성의 그늘에 감추어져 있던 신체, 자연, 사회현상의 모순, 대립, 갈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과학이론과 지식을
예술언어로 예증하는 차원을 넘어 미디어라는 첨단매체를 통해 과학, 철학, 종교, 역사관의 한계를 제시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가령 고개를 숙이며’Yes’를 내뱉는 이미지와 자신의 뺨을 때리며 ‘No'를 외치는 이미지
컷들을 디지털 방식으로 편집, 조작하여 늘린 후 각기 다른 화면 위에 투사시킨 “카오스”라는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순환적 흐름을 파괴한 후 비선형
동적 시스템으로 변환시켜 복잡함과 잡음 속의 규칙성 반복적으로 드러내주며, 빠름과 느림이라는 예정된
속도 속에 예측 불가능한’정지‘된 시간성을 포치시킴으로써
뉴턴적 절대시간과 공간을 부정하는 카오스적 시공간을 표출시킨다. 거기에 극단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규칙적
소음이 가해질 때 그곳에서 상실과 가치부재의 시대가 낳은 아노미 현상의 징후가 목격되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질서의 전복현상을 통해 시간의 급진성에 제동을 걸며 궁극적으로 무질서의 공감각적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시각과 청각의 순수 고유지평이 동시에 상실되는 그 세계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인간의 변조된 음성은
차라리 시각을 겁탈하는 청각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카오스”는 컴퓨터를 통해 이경호라는 사적인 육체를 위조시킴으로써 정신이 육체를 부정하고 조종하는 초라한 자아의 본질을
노출시킨다. 마치 하임 (M. Heim) 이’가상자아‘를 두고 “육체의
불투명성을 흡수하고, 고깃덩어리를 갈아서 정보를 만들고, 에로틱한
삶은 꼭두각시놀음으로 전락시켜 조종거리로 만든다.”고 했던 것처럼 이경호의 디지털 화된’자아‘는 비밀스런 자기애의 쉼터마저 집어삼켜버리는 자학과 자기혐오의
일단을 드러냄으로써 자아라는’운명‘을 스스로 탕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Yes’ 도 ‘No'도 아닌 일견 무의미함을 보이는 그의 작업은 정신이
나간 자, 고독한 자의 중얼거림과도 같은 의미 없는’독백‘을 닮아있다. 그러나 그 맹목적이고 무목적적인 혼돈의 메시지는 종국에는
반사적인 자기존재 처절한 확인작업이다. 왜냐하면 그’중얼거림‘이란 어떤 수신자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향한 고독한 부메랑일 뿐인 것이다.
한편 물에 비친 달의 형상을 인터렉티브의 피드백 효과를 통해 증폭시킴으로써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감을 추구한 “디지털 문”은 매혹적인 푸른 화면위에서 쌍방형성의 변주를 선사한다. 즉 관람객이 푸른빛을 완전히 가리면서 지나갈 때 우주의 빅뱅을 닮은 화면의 폭발이 이루어지며 관람객을 일순간
나르시시즘의 블랙홀, 즉 카오스의 세계를 안내하는 것이다. 거기서
수용자는 감성과 이성, 평상심과 극심한 혼란 사이를 왕래하며 “카오스”작품에서의 정지된 화면과 유사한 정신의 공황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푸른빛에 의해 풀려버리는 자아의 실종이요, 그러한 탈자아속에서 또다시 자신의 중심을 잡으려 발버둥치는
현기증 나는 카오스적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그렇게 시공간의 카오스 속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통합변조를 통한 복합 감각적 조작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이경호의 새로운 디지털
작업들은 형식 미학적 입장에서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4개의 키워드를 함축적으로 연상시키고 있다. 즉, 활동(action)에서
명료화(clarification), 변형(transformation),
그리고 침묵(silence)의 단계를 반복해서 왕래한다는 의미다. 그러한 변형과 침묵 사이의 유연한 중개적 과정을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으로 접근하여 자아와 세계의 비선형적, 불가해적 신비의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단한 자기갱신과
확장의 예술적 실천이다. 모니터 공간 속에서 완전히 환원되거나 흡수될 수 없는 불확정성의 세계, 의사환경 속에서 변질된 사이버자아(Cyber-self)의 표류의
시선을 통해 오히려 흔들리는 세계를 바라보려 하는 꿈과 카오스의 불안한 이중주 말이다.
The world of which Lee Kyoung Ho dreams is the indeterminate world. Same as it
has found a certain rule in confusion, but it cannot yet predict the future of
the unstable phenomena. Through incessant self-negation, he attempts to face
the complex world of chaos which can be neither egated nor affirmed, while
meditating seriously on such phenomena hidden in the shadow of reason as human
body, nature, contradiction, confrontation and conflict of the society. Just
beyond describing scientific theories and knowledge with artistic language, he
shows us a 'paradox' suggesting a limit of science, philosophy, religion and
history by using the most advanced medium called 'media'. For examples, in the
work titled 'Chaos', an image shouting 'Yes' with the head bowed or
an image slapping the cheek and shouting 'No' is edited into the digital media
to be elongated and projected onto other screen. Thus, the cyclic flow of time
and space is destroyed, because the non-linear dynamic system reveals
complexity and noises regularly and repeatedly. Moreover, unpredictable
'stopped' time is set at a pre-determined rapid or slow speed to negate
Newtonian absolute time and space. The result is a Chaos time and space. When a
regular noise which cannot be endured is added to it, we will witness a symptom
of anomie which has resulted from sense of loss and lack of value. In other
words, the rapid flow of time is checked by reversal of the sensual order, and
the ultimate goal is to reveal a synesthetic world full of disorder. In such a
world where the pure horizon of visual and auditory senses has been lost
simultaneously, the human voice modulated to resemble beast's roar will become
an auditory sense overshadowing the visual sense. Thus, in the work 'Chaos',
Lee Kyoung Ho's private body is fabricated by computer. The resultant effect is
that mind negates body to control it and thereby, that a shabby essence of ego
is exposed. Just as (M.Heim) sets a 'virtual ego' and has it absorb the opaque
body, and grinds the body mass to create an information and ultimately,
degenerate the erotic life into a puppet play, so Lee Kyoung Ho's digitalized
'ego' reveals a self-torture and self-abhorrence engulfing even the secret
self-affection only to exhaust and consume the 'doom' of ego. In this sense,
his work signified neither 'Yes' nor 'No'. It looks insignificant, and it
resembles insane people or lonely person’s mumbling or 'monologue'. However,
the blind and aimless message of confusion reflects author's self- existence.
It is a wretched struggle to affirm the ego. Since 'mumbling' does not assume
any receiver, it must be a lonely boomerang returning towards his ego.
'Digital Moon' which describes a shape reflected on the surface of water amplifies
the feedback effect of interactive to purse an exchange between digital and
analogue. It shows a variation formed on an attractive blue screen. When the
audience passes by it hiding the blue light, they will see a screen explosion
resembling the Big Bang of the universe, being guided instantly into the black
hole of narcissism or the world of Chaos. There, the audience will reciprocate
between emotion and reason, and between homeostasis and extreme chaos. They
will also experience a mental panic similar to the stopped screen in the work
Chaos. It is like the ego lost in the blue light. Then, the audience will face
a dizzy chaos where in the struggle to be correctly centered.
Lee Kyoung Ho's new digital works designed to maximize the complex sensual
manipulations through integrated modulation of images and sounds in the
temporal and spatial chaos connote four key words of Wittgenstein's philosophy:
action, clarification, transformation and silence. His works reciprocate among
these four stages repeatedly. The smooth relay process between transformation
and silence is treated with the digital processing to explore the mysterious
arena. It is an incessant self-rehabilitation and expansion. It is a kind of
artistic practice. The indeterminate world can be neither reduced nor absorbed
completely. The cyber-self is transformed in a pseudo-environment to drift. His
world is swaying. It is an unstable duo of dream and chaos.
(거기에)있을까 ? 돈이
있었던곳에.
(거기에)있을까 ? 기계들이, 텔레비젼들이, 진공 청소기들이,
불꽃들이, 소리들이, 소음들이, 종들이 있을 것이고,
내일엔 불도져들이, 헬리콥터들이, 기차들이 있을것이다.
언젠가 이 지구에 계획된 가상의 외계 침략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있지 않을 것이다 ? 꽃도, 과일들도, 나무잎도, 나무가지
하나 없는것이.
소유가 있을 것이고 결핍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자연 부재의 공간이 있을 것이다. 보다
더 정열적인
무대를 위해 면밀하게 불살라버린 이 지구(흙)에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결국, 공간의 남긴흔적 뒤로 시간과 육체의 등장이 있을 것이다.
기계들이 의미를 삼켜버리고, 세상을 먹어 치우는 한편,
종이 상자, 욕조 그리고 비너스와 다이아나의 사수는 탄생한다.
존재와 이 세상에 나지 않음에 대한 퍼포먼스.
모니터의 눈속으로 향하는 화살.
태어 나기 그리고 악을 박멸하기
경호 리, 작은 병사여
부디 몸 조심 하시요.
Michel
Enrici
Il y aura? il y a eu l'argent.
Il y aura? il y a eu des machines, des
téléviseurs, des aspirateurs, des flammes,des
sons, des bruits, des cloches et demains des
buldozers, des hélicoptéres, des trains.
Il y aura un jour ou l'autre une attaque terrestre,
scénarisée.
Il y aura pas, il n'y a pas eu ni fleurs, ni fruits, ni
feuilles, aucunes branches.
Il y aura un avoir et il y aura un manque.
Il y aura surtout cet espace sans nature, il y aura ce
manque, cette terre soigneusement brulée pour plus
de scène, pour plus d'élan.
Il y aura enfin un temps tracé comme un espace et
l'émergence d'un corps.
Naissance de l'archer en diane et vénus, baignoire et
carton, tandis que les machines mangent le sens,
mangent le monde.
Performance d'être et de ne pas naître pu'au monde.
La flêche vers la pluie magnétique.
Naître et tuer le mal
Kyoung-Ho Lee, petit soldat
Prenez bien soin de vous.
Michel Enri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