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의 여정과 그 사이 - 중간자 박세희의 세상사유
조인호 (광주비엔날레 정책기획실장)
박세희. <the space in between_train>. 2016. 1분 영상
사람의 현세 삶이란 생과 멸 사이 한 토막 여정이자 시작과 끝 사이를 이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출발지와 끝지점이 같지 않고 다른 지점으로부터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면서 각자의 에너지에 따라 그 삶의 반경이나 자취를 달리하기도 한다. 원초적 뿌리로부터 이탈된 분리와 불안을 넘어 세상이라는 무대로 나서면서 자기세계를 일구고, 수많은 지점들을 이동하고 접속하지만 어느 땐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오는 출발과 회귀가 일상 또는 일생이 되어 간다. 태생부터 한평생 반복되는 시계추나 그네와도 같은 가지런한 평생에 자족하기도 하고, 불안하지만 힘껏 차올라 좀 더 멀리, 더 높이 생의 공간을 넓혀나가기도 한다.
박세희의 작업은 시작과 끝, 생과 멸, 현존과 사라짐, 분리·확장과 회귀, 과거와 현재, 이쪽과 저쪽, 의식과 무의식 사이 등등.. 헤아리기 어려운 수많은 결들의 인생 간극과 역사라는 여정들을 주시한다. 나아가 그 이전과 이후의 드러난 구간의연장선에서 미지의 영역까지를 연결 지어 통찰해 들어가려는 구도의 탐구과정이다. 존재를 드러내어 생명활동을 펼치다 서서히 스러지거나, 전원이 꺼지듯 순간 사라져버리는 유명·무명의 생, 그 텅 빈 공허나 어둠과도 같은 드러날 듯 말 듯한 시공간 속에서 어떤 자취들을 더듬지만 사실은 그 자신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지혜를 구하는 자’로서 가시적·비가시적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사이버스페이스처럼 투명한 상상의 세계로 시각화시켜내려 한다. 시작과끝의 구간을 이동하는 한 생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중간자’인 자신을 확인하고 이를 이미지와 텍스트로 반추해내는 것이다.
삶의 체취가 배인 낡은 장롱 이불더미 속에 새털처럼 내려앉은 이방인의 수면, 어느 생의 종착지이자 또 다른 세계로의 통로일 수도 있는 무덤 앞 살아있는 자의 동면, 세상에 대한 불안과 새로운 세계의 기원이 함께 담겨진 방주 또는 생의 요약과도 같은 ‘쿤스트 캄머’(KUNST-KAMMER, 캐비닛)로서 장롱을 짜고 그 속에 생활잡화 파편들과 여러 떠도는 대륙들과 지폐와 자신의 존재를 함께 안치하고 이내 고스란히 불길로 소멸시켜버리거나, 황량한 사막과 창백한 나뭇가지 혹은 텅 빈 방을 배경으로 책과 지폐와 삶의 흔적들을 소지처럼 불태우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 숨 쉬는 생명존재이되 주검의 상징이기도 한 얼굴 없는 미이라가 된 자화상, 공간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따라 쉼 없이 들고나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물보라, 녹색풍경이 불에 타 걷혀지면서 실상인지 가상인지 새로 드러나는 또 다른 풍경, 검은 막이 불타 없어지면서 드러나는 개인과 시대의 무덤이자 현실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고인돌, 누군가의 이주 이후 폐허의 공간에 잔해처럼 남아있는 어떤 삶의 흔적들, 체취마저 사라진 빈 방에서 교감하게 되는 실재공간과 무형의 흔적 간의 보이지 않는 교접, 타국에서 만나는 낯선 삶과 그들의 풍물, 도회지 변두리의 낡은 삶의 공간과 그 곳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삶의 현장기록 등등.. 개념과 사유와 이미지가 결합된 박세희의 여정의 기록들은 회화, 사진, 영상, 설치, 행위로 소재를 달리하며 일련의 시공간을 재현하고 제시해 나간다.
“인생의 삶은 끊임없는 이동의 삶으로서, 자궁에서 지구로, 그리고 지상에서 이후의 어떤 곳으로 옮겨가는 생성과 소멸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동과 정착이 반복되는 삶 가운데 생겨진 습관은(뿌리내릴 근거를 만들지 않는) 계약을 맺지 않으려는 것이며,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노마딕한 라이프 습관은 ‘Place' to 'Place'의 이동에서 ‘Space' to 'Space'로 준비를 하게 되는 형식으로 드러났다.”고 말한다. 장소와 공간과 시간 사이의 이동, 그 여정 중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새로 덮여지는 생각들을 탐구해 가는 과정을 박세희는 ‘중간지대 프로젝트’라 이름 붙였다. “나의 생활패턴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지대를 살고 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거나 그 모두에 속하거나 하는 확장된 개념의중간지대이다. 그런 중간지대적 풍경은 개인의 상황이면서 크게는 모두의 일상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일상과 상상, 가상 또는 허상 사이를 드나들며 시각이미지와 상징기호와 텍스트로 풀어내는 과정이다. “이데아를 향해 살아가는예술가로서 다음 단계의 삶으로 도약하기 위한 여정”의 편린들인 셈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이번 전시 또한 육신의 감각으로 지각하는 시간의 속도, 시공간을 이동하는 중에 느끼는 시간의 분절과 통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무한세계의 상대적 속도’에 관한 탐닉인데, 요즘 계속 이어가고 있는 ‘중간지대’ 연작이다. 가령, 일상의 이동 중에 우연찮게 경험하는 나와 세상이 스쳐 지나는 시간의 속도, 비행기나 고속열차나 자동차 같은 기계적 에너지로 증폭되고 압축되어진 시간의 경험을 일정한 시간의 궤적 속을 순간이동하면서 담아낸 영상 설치이다.
이번 전시는 무중력 상태와도 같은 어둠과 고요만이 가득한 전시장에 시각 청각적 요소를 최대한 절제한 단 두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the space in between_lighting>은 커튼스크린에 번쩍이는 뇌우 영상이다. 비어있는 듯 꽉 차 있는허공의 에너지가 찰나의 파열로 천지간을 관통하며 세상이라는 공간의 실체를 일깨우는 영상미디어 설치다. 강력하게 압축된 빛의 에너지가 흑암의 공간을 찢듯이 섬광으로 번뜩이고 그 사이사이 잠시잠깐 노출되는 허공의 뭉게구름은 허와실의 공간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인간 초상이자 삶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비행기 여행으로 세상과 우주의 중간지대에 떠가는 중에 우연찮게 스치게 된 구름더미 속 번개를 순발력 있게 포착해낸 이 영상으로 ‘속도를 통해 깨달아지는 세계’와그 속에서 유영하고 이동하는 중간자로서 인간 삶의 모습을 되짚어보는 성찰의 단편인 셈이다.
이는 여러 겹 거울 띠들로 만들어진 블라인드에 한밤 중 고속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촬영한 영상을 투사한 <the space in between_train>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 만상이 어둠에 묻힌 깊은 밤 오로지 기차의 기계음과 몸으로 전해오는미세한 진동들로 속도를 감지하면서 그 이동의 구간 중에 유성처럼 스쳐 지나는 가로등 불빛들을 통해 세상과 공간과 나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무한 우주공간 속 무중력 상태로 어디론가 이동하는 행성처럼 느낄 수도 있는 지각경험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순간 점점의 조명들이 빛무리를 지어 빨려 들어오다 한 순간 섬광처럼 나의 감각을 훑고 지나가는 공간과 속도와 빛의 경험을 마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방인 같은 낯설음과 설레임으로 담아낸 영상이미지인 것이다.실재하면서 무중력 상태와도 같은 공간과 시간의 이동 경험은 영상과 스틸 컷 이미지로도 환기된다. 분절되면서 관통하기도 하는 시공간의 이동과 삶의 여정은 긴 영상의 특정지점에서 포착된 순간의 이미지와도 같은 것이다.
거울 블라인드와 커튼 스크린은 우리가 지각하는 시공간의 이쪽과 저쪽, 안과 밖, 사유와 현실 사이를 이어주고 매개하는 ‘창’의 개념으로 차용되었다. 시공간의 경험은 그 안에 머무를 때도 그렇지만 그 지점을 벗어난 또 다른 지점에서 관찰하고 사유할 때 훨씬 더 많은 진폭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미디어라는 매체를 세계를 넓게 보도록 하는 창, 그 창 너머의 세계에 의해 확장되는 넓은 방으로 인식한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구조 속의 나’를 끊임없이 탐구해 가는 박세희의 인문학적 시각매체 탐구작업은 2013년 광주에서 첫 발표전 이후 불과 3년여 사이에 무던히도 넓게 여러 지점들을 거치고 접속해 왔다. 아직은 신진작가 세대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의 인생여정의 무대로 펼쳐지는 이 세계의 본모습에 대한 진중한 성찰이면서, 세상이라는 지금의 시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의 현재 지점을 보여주는 전시회이다.
박세희. <the space in between_lighting>. 2016. 1분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