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두 질문은
나의 작업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이동’이라는 경험을 통해 질문을 체득하고 예술로서 드러낸다. 예술은 초월적인 것과 제한적인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가 되고 그 사이의 중간지대를 오고가는 중간자는 예술가가 된다. 나는 그 초월적인 무한한 이미지를 보기위해 다양한 매개를 사용한다. 회화에서부터 사진 비디오 그리고 설치와 같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여행을 하며 너머의 세계를 경험한다.
‘What can art do? What is the purpose of an artist?
These two questions are the main reasons I make experimental works. Through my experiences - for example of relocation,
I have asked these questions, exploring ideas though different mediums. I learnt that through my works that the art became the medium between the transcendental world and the real world. The artists' role then becomes the ‘guide' to link these worlds together helping others see the space in-between them.
To see the infinite world, I use various mediums as lenses to examine what lies beneath the immediate surface and I use painting , photography, video and installation to bring them to the surface for all to share what I have found.
Narrative/ Nomadic한 삶의 여정.
다양한 이유로 본인은 광주라는 한 지역안에서 조차도 수 많은 이동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대전에서 그다음은 러시아로 어린시절의 기억들은 ‘이동’에 관한 것이었다. 이동과 정착 이것이 반복되는 삶 가운데 생겨진 습관은 계약을 맺지 않으려는 것이며, 1평 남짓되는 정도의 공간을 만족해 하며 부피가 큰 것은 되도록 구매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하며 살아왔다. 언제든지 시나리오에 따른, 현 가상의 생활을 접고 다음 공간으로의 이동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언제나 삶은 여행이고 모험의 연속 이듯, 뉴욕으로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예술가의 삶으로 살아가면서 나의 작업에 관한 것을 뒤돌아 볼때, 수많은 이동에 의해 생성된 삶의 단편들의 모음 이라는 것을 발견 하였다. 그뒤부터는‘이동’에 관한 이야기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Theme
우리가 ‘이동’ 하면서 만나는 시간과 공간들 그리고 이야기들은 가상의 ‘정착’ 속에서 만나는 것들이다. 이 이야기들을 재현하기 위한 연출된 화면구성(포토꼴라쥬)부터 시뮬라시옹으로서의 공간을 만들기까지 확장 되었다.
본인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재현은, 시뮬라시옹으로서의 가상의 재현을 통해 본질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시간을 연출(연출사진), 의도적 화면 재배열(포토꼴라주), 그리고 공간을 실재한 모형으로 보여주는것(설치)들은 동시에 실상(이데아)의 모형을 위한 가상으로서의 재현이 되기도 하는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많은 비밀과 메세지가 숨겨져 있다. 나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그것을 찍고 만들어 기록하는 자로서) 그것을 발견하고 해독하는 임무를 받은 자라고 생각한다. 세계에 흩어진 비밀은 나의 ‘이동’이라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거대한 의미의 아우라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삶속에 끼어있는 일상적인 것에서 보이지 않는 가능태의 아우라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거대한 산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예술은 여정과도 닮았고 그 조각의 풍경들의 모음을 통해 전달하는 매개자와 중간자적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 이렇게 개인의 사소한 경험들로 시작된 ‘이동’이라는 테마는 인류의 거대서사에 이르는 ‘삶生과 죽음死’을 이야기 하게 하였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이동의 삶으로서 자궁에서 지구로 그리고 지상에서 이후의 어떤 곳으로 옮겨가는 생성과 소멸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Migration’ 이동이라는 큰 테마의 작업 속에는 삶과 죽음의 인상이 함께 공존하는 장면들, 내주가 가능한 곳으로 밀착된 풍경들, 그리고 어느 순간은 여기있음을 지각하기 위한 시도들의 기록들이 있다.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해 겪게 되는 이동의 기록을 통해 삶을 거주라는 기반위에 올려놓고 다층과 다면 다각의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Recent project _the Space in between
중간자
플라톤의 『향연』에서 보면 아름다움의 본질과 지혜를 소개하며 이를 탐하는 자로 에로스가 등장한다. 에로스는 어머니의 본성을 따라 결핍을 갖고 태어나지만 아버지의 본성으로 이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자다 . 결핍을 극복하려는자, 에로스는 무지함과 지자가 되는 사이에 중간자이다 . 중간자는 신으로부터 난 자로 지혜의 근본이 되는 지자의 본성을 부여받아 인간의 무지함으로부터 도망치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자이다. 에로스는 중간자로서 지혜를 구하는 자, 지자가 완전체임을 아는자,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되려는 자, 혹은 예술가일지도 모른다.
중간지대
우리는 끊임없이 이동을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친구집은 어디에’ 라는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친구집을 찾기위해 반복적으로 그 곳을 다녀가는 화면을 보여준다. 그 장면과 장소에 익숙해져 관객은 그 마을의 거주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낯선 곳으로도 여길 수 없게 된다. 영화에서는 어느새 주인공을 뒤따라 관객마저 그 길위에 서게 만든다. 키에르케고르의 공중그네 이야기는 이 중간지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도착을 보증하는 여정이며 그 가운에 느껴지는 불안 또한 긍정적 기대로 환기가 된다. 나의 생활패턴은 여러가지 이유로 중간지대를 살고 있다. 어느곳에도 속하지 않거나 그 모두에 속하거나 하는 확장된 개념의 중간지대이다. 그곳은 여기와 거기를 잇는 교량위의 삶이기도하다. 그런 중간지대적 풍경은 개인의 상황이면서 크게는 모두의 일상이된다.
앞서 소개한 에로스가 지자가 되기 위한 삶으로써 중간자이듯이 예술가도 이데아의 참된 상을 향한 중간자가 된다.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이동이라는 사건을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이 중간지대를 살아가며 역시 그 곳의 거주민으로서 모두는 중간자가 될 수 있다. 예술이 이쪽과 저쪽의 삶을 잇는 교량의 역할을 하듯이 우리삶의 전체또한 다음을 위한 교량위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동매체는 이러한 특수한 지대를 감각하게 한다. 이 지대를 중간지대라고 이름짓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계속적으로 경험되는 독특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버스, KTX, 그리고 비행기를 통해 그네타기 비유의 중간지대를 경험하게 된다. A로부터 분리되어 B를 향해가는 어떤 반동에 의해 진행되는 우리의 삶은 광학적 미디어를 통해 더 실감된다. 이 작업을 통해 나는 보이는 장면과 장면 사이 전환되는 레이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를 시도했다. 미디어는 감각을 분절하여 지각할 수 있게 한다. 즉, 앞서 논의하던 초월적인 대상을 지각하는 것은 더욱 촘촘한 지각이 요구되며 나는 이를 지극히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발견한다.
이 중간지대 프로젝트는 중간자가 살아가는 지대이다. 중간자는 이데아를 향해 살아가는 예술가이면서 다음단계의 삶으로 도약하기 위해 현실을 삶을 여정으로써 살아가는 자들이다. 과도기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거주지의 단면을 통해 중간지대를 상상하기도 하고 이를 사진함으로 기록한다.
더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가장큰 영향 을 받게된 매체는 이동수단이다. 어두운 밤은 지각하고 있는 주체가 이 매체를 타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즉, 미디어를 지워버리는 투명한 경험이 시작된다. 아주 감상적인 상태로 몰입하게 되고 KTX가 빠른 속도로 밤풍경을 스치듯 달려갈때 그 감정은 고조된다. 열차가 터널안으로 빨려들어간지도 모르게 진입이 되었을때 터널에 부착된 작은 전구나 사인물들은 빛의 흔적으로만 남겨지게 되어 마치 가상의 공간에 있는 착각을 가져오게 한다. 터널 이전에 멀리 보이던 영롱하게 아른거리는 빛들은 멀리있기 때문에 현실의 빛으로 지각하게 되며 터널이라는 공간에 진입하게 되었을때는 동굴안에 갇힌 시차 때문에 빛이 번지게 되고 더 빠르게 가속화되어 사이버스페이스를 연상하게 한다. 마치 ‘앤트맨’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몸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수트를 입고 입자보다 더 작아지는 버튼을 눌러버려 경험하게 된 입자 사이의 초월적 풍경 같았다. 그 세계는 현실속에 존재하지만 과거도 미래도 구분할 수 없는 시간밖의 공간이었다. 즉, 미디어시티에서는 거대한 대상앞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나 숭고미가 개조되어 역으로 ‘나’를 줄어들게 만들어 그 사이를 감각 할 수 있게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도처에 작은 사건들을 통해 지각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