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혼(Erehwon)전에 부쳐…….
김병헌(의재미술관 학예실장)
나명규 작가의 작품들에 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이번 전시의 제목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시다시피 에레혼이란 말은 영국 소설가인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 1835-1902)가 1872년에 익명으로 내놓은 소설의 제목에서 온 것이다. 버틀러가 자신이 살던 빅토리아 시기의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쓴 이 소설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의 ‘nowhere’에서 ‘w’와 ‘h’만 바꾸어 철자를 거꾸로 뒤집은 말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유토피아(utopia)와 같은 뜻을 갖는 것이라 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질병을 죄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병든 사람을 범죄자로 취급하며, 기계를 잠재적인 위험물로 인식하여 오래 전에 기계를 없애버리는 등 일반적인 유토피아로서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어서 제목과 내용이 상반되는 일종의 이중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나명규 작가의 작업들 역시, 물론 소설과의 차이는 있지만, 거대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중성들과 관계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동상이몽>전에서처럼 변화와 정체, 안과 밖, 낮과 밤, 자연과 도시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외면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문제들을 폭넓게 작업을 해왔다. 때로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와 같은 사회와 자신의 신체(body)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주목하여 매일 바뀌는 환경에 변화하는 자신의 몸을 작품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띠를 나타내는 양을 소재로 설치를 하기도 하며 자신이 다녀온 여행지 등을 영상에 담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가 항상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주로 자신의 신체를 테마로 작업을 해왔다는 점에 있어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명인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1908-1961)를 떠올리게 한다. 실존주의적 사고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퐁티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와 사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신체의 현상학을 다루는 그에게 신체란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자 가장 구체적인 실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체와 사고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인식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고는 머리에서 하고 감각은 오관에서 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는 신체 자체가 사고의 주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세잔느(P. Cézanne, 1839-1906)의 ‘눈으로 생각하라’라는 말처럼 철학이란 머릿속에서 구성되기 이전의 신체의 세계를 파악하여 기술하는 것이라고 보며 따라서 학문 내지 과학을 반대한다. 그는 과학이 개입하기 이전의 사물과 인간의 구별이 안 되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사물 그 자체의 존재, 즉 신체의 세계를 미술이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퐁티의 신체의 현상학과 나명규 작가의 신체가, 일부 비슷한 면도 있겠지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명규의 작업이 세잔느가 추구하는 그와 같은 사물과 맨 처음 접촉했을 때의 오관이 구별되기 이전의 눈과 귀와 코 등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그러한 신체의 세계는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자는 퐁티에게 영향을 주고 실존철학의 근거를 마련했던 독일의 철학자 하이덱거(M. Heidegger, 1889-1976)의 사상에서 나명규의 작업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고 보인다. 하이덱거에게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존재(Sein, Being)일 것이다. 그는 이전 서구의 전통적인 철학에서 존재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전통적인 존재론들이 간과해왔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란 ‘존재자(beings)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자란 우리 주변의 돌, 나무, 책, 핸드폰 등의 사물뿐만 아니라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같은 사람 등 모든 있는 것들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한다면 ‘존재란 어떤 하나의 존재자와 같은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의미와 관계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존재를 파악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로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존재자와 달리 인간만이 이와 같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한다고 하이덱거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를 그는 현존재(Dasein)라 부르는 것이다.
나명규 작가의 작업들은 하이덱거가 가리키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이라고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해왔던 작업들처럼 우리는 그를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가장 큰 문젯거리로 삼는 그러한 태도를 지닌다는 점에 있어서, 하이덱거가 말하는, 실존(Existence)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물음들의 형식에 있어서도 영상, 사진, 조각, 설치 등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매체들을 총동원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 있어서 오늘날처럼 복잡다단한 거대한 사회에서의, 즉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 더 이상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방식을 상실하며 살아가는 비본래적인 실존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과 한계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파악하고서 그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본래적인 실존으로 되돌아가고자 함을 엿볼 수 있다. 나명규 작가의 작업노트의 일부로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언젠가 TV에서 본 푸른 초원의 평온한 듯 한 양의 모습은 불현듯 차갑고 비장한 도시 속에 살고 있는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음을 느꼈다. 양 특유의 평온한 모습이지만 민감하고 놀라면 민첩해지는 특성은 나와 동일시하게 되었고, 망설임 없이 나의 작업 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렇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번 작업이 내 목소리로 내 생각을 세상으로 크게 울려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작업노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