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승찬 작업론
사적인 것의 공적인 것으로의 이행과 태도의 문제
글_이명훈(독립큐레이터, 공공미술기획), 2008
“나의 작업은 아주 사적인 관심사들을 나열하고 제시하여, 사회 병리 현상적 관점으로 생각하기, 바라보기를 행하는 과정들이라 하겠다. 즉 ‘나’ 개인의 어떤 취향의 것들을 특정 장소나 공간(공공, 사적인 곳)에 대입시켜, 타인들이 느끼고 향유했던 인식의 고리를 찾아보고, 그에 가벼운 제스처를 적당히 배합해 나열한다. 한 개인으로서의 ‘나’와 타인(관람자, 일반인)으로서의 ‘너’의 어떤 공통성과 서로 다른 감성적 인식 차이에 관한, 흥미를 도출해 나가는 작업들이라 하겠다.” - 권승찬 -
작가 권승찬은 자신의 작업론을 이렇게 기술하고 하고 있다. 개인의 관심사를 사회적 맥락과 관점으로 옮기는 과정, 그 과정에 참여하는 재미, 그 재미가 불러일으키는 공감대, 그 공감대를 통해 작가의 작업은 혼자 떠들기가 아닌 서로 소통하기로 나아간다. 하지만 소통은 쉽지 않다. 어떤 메시지에 대한 소통은 오해를 줄이는 의사행위를 뜻하지만 완전 이해를 달성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심지어 왜곡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명료하지 않은 것에 대한 소통하기를 지속한다. 왜 일까?
소통은 상호작용(interactive)이다. 즉 통(通)한다는 것은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 다방향적인 것으로 일정부분 공동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다중간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 상호작용 혹은 피드백(feedback)이란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순환을 의미한다. 물음에 대한 응답, 작용(action)과 반작용(reaction)이 이루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작가는 상호작용성의 예술을 추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이행시키는 상호작용의 예술, 개인을 사회적 문맥으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사회화 예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술행위는 자기 독백과 내면의 세계-자신의 관심사를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고립 그 자체로 끝내는 여타의 예술행위와 대조적이다. 예술은 지극히 개인의 표현영역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런 채로 끝나버린다면 예술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소외되기 마련이다. 예술을 하나의 물질로 규정하고 그 쓸모를 일상 속에서 찾는 것은 무리이다. 예술을 인간의 정신태의 하나로 규정하고 그 쓸모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예술가들이 소통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나름 합당하다. 오늘날 예술의 위기는 다름 아닌 소통에 대한 노력의 부재, 그 부재로 말미암아 예술로 관계하기, 관계 맺기에 대한 예술의 공동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최근 새롭게 공공미술이 주목받는 맥락이기도 하다. 우리가 새롭고 실험적인 예술행위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계속해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세계에 대한 흥미, 관심과 관계를 새롭게 찾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을 단순히 물질이 아닌 하나의 정신태라고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정신태로서의 예술은 흔히 태도로써 드러난다. 소통도 어찌 보면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관심사, 그것도 ‘아주’ 사적인 관심사를 통해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작가 권승찬의 화두는 이것일 것이다. 이때 ‘사적인 관심사’는 작업의 주제이고 ‘어떻게’는 작업의 방법과 소통의 가능성이고 과정을 의미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목적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달이 아닌 참여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흥미를 도출해 나가는 작업’에 그의 목적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영어의 흥미(interest)가 ‘사이에 존재하는 것’, ‘-관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참여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하는 것이다. 즉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관심사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참여할 수 있을까라는 동기부여가 필요한 것이다.
소통,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물학적이고 지적인 호기심과 타자-낯선 것에 대한 경계와 무지(無知), 그 무지에 의한 불안, 그 경계를 확인하고 싶고 불안을 해소하고 싶은 자기 방어적 행위로도 이해할 수 있다. 예술가는 일상의 다양한 사건과 사물, 그것의 현상을 낯설게 하는 특별한 기술을 고안해 냈고 이를 통해 인간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해 왔다. 예술에 대한 해석과 비평은 그 가치에 대한 판단의 영역을 넘어 불명료한 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인간의 호기심, 그 호기심이 만들어 내는 소통에 대한 요구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명백하고 명료한 것은 예술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의 영역에 가깝다. 어떤 예술작품을 명료하게 해석하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이러한 예술이 가지는 속성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호기심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 동안의 작업에서 권승찬이 일관성을 가지고 모색하고 실행했던 것은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이행시키는 상호작용적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이행의 과정은 단순히 ‘방향에 대한 지시’가 아니라 ‘관심에 대한 유도’이다. 명함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 작업, 문을 통해 건물(자취집)을 기억하게 하는 작업, 창을 통해 공간 내부에서 공간 외부를 보게 하는 작업, 일상의 사물로 사회의 풍경을 오버랩 시켜 보여주는 작업, 현수막을 걸어 사라진 과거 광주터미널의 사진을 모으는 작업, 개인의 목소리(이야기)를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남들에게 들려주는 작업, 이 모든 작업에는 지시가 아니라 유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름, 공간, 장소, 풍경, 사물, 사건에 대한 우리의 망각을 끄집어내는 기억의 기술, 이것이 작가 권승찬이 시도하는 예술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명백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개인적 삶과 공동의 삶은 칡나무와 등나무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조를 가진다. ‘나’의 정체성과 ‘나’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는 공동체란 폭력과 공포에 가깝다. 사적인 이익을 더욱 증대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시스템과 그에 대응하는 무차별적 공익, 과도한 애국심을 앞세우는 국가주의 공공시스템 속에서 우리의 삶, 당신의 삶은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며 국가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 오늘날 시스템 속의 ‘나’이다. 작가 권승찬이 시도하는 이행은 바로 이것이다. 사회와 국가에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려는 이행이 아닌 어떤 일상의 현상을 시스템의 관계 속에서 성찰하고 인식하는 것. 그것을 끄집어내는 일.
그의 작업은 어떤 심오한 미학의 영역이기 보다는 일상의 커뮤니케이션학의 영역에 가까워 보인다. ‘표현하기’보다는 ‘말 걸기’에 가까운 그의 작업에서 그는 먼저 자신의 생각, 이미지, 이야기를 꺼낸다. 때로는 하찮고 시답지 않은 투정에 가깝고, 음담패설로 들리고, 말장난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말 꺼내기’는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유도하고 어느 사이에 그와 대화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의 작업론에서 ‘관심사들의 나열’, ‘가벼운 제스처’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저것-아주 사적인 관심사를 ‘적당히 배합해 나열’하는 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골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반응(reaction)을 유도한다. 다시 말해 작업과 일정부분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나열된 이미지와 오브제들은 일종의 미끼로 둔갑한다. 감성보다는 호기심을 우선적으로 자극하고 관객을 작업의 한 요소로 포함시키는 이러한 작업의 전략은 예술에 있어 태도의 문제를 계속해서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의 예술은 관객과 공간, 일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작가 권승찬의 작업은 “예술가는 작품으로써 모든 것을 말한다/말해야 한다”라고 하는 작품중심의 예술론에 대해 “예술가는 태도로써 모든 가능한 것을 말한다/말해야 한다”는 것으로 예술과 그것의 감상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끝>
권승찬展 -"10"
조인호(미술사, 광주비엔날레 정책연구 실장)
장소와 사람과 삶의 소통관계
권승찬의
작업은 대부분 개인의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장소와 사람의 관계를 끄집어내고 시각이미지로 드러내어 사회라는 외적 범주 속에서 되 비춰보고 세상에 대한
발언들을 엮어내는 연작형식들이 많다.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작업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개별존재로서 자기영역과 공적인 바깥세상과의 줄을 잇거나, 개인과
개인의 관계들을 연결하고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지속적인 시도이다. 환경과 조건이 다른 여러 현장프로젝트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공공영역에 참여하면서 또 다른 세계나 존재들을 경험하고 소통의 새로운 발견과 가능성들을 체험하면서 사람과 장소와 공간에 관한
문화적 행위로서 네트워킹에 중심을 두게 된 것이다. 삶의 흔적이면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로서 장소와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공간과 사람의 사회 문화적 관계에 대한 이미지화 작업이기도 하다.
공간과
장소와 사람의 사회적 관계
권승찬은
장소와 사람의 관계를 특정한 곳에 빨간 카드를 들고 선 흑백의 인물사진들로 이미지화시켜 나간다. 동시에
사이버공간인 구글 어스(Google Earth) 영상지도에 촬영한 각각의 지점과 사람들을 심어나가며
온라인 군집들을 계속 넓혀나간다. 이는 실재와 가상공간 사이를 연결하면서, 구체적 실체와 불특정 다수 사이를 매개하는 온ㆍ오프라인의 양방향 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구글 어스 작업은 특정한 공간ㆍ시간ㆍ사람을 이미지로 기록해 나가던 중 당사자나 그 주변만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장소를 접속하고 역사와 흔적과
실재를 새롭게 발견하며 공유할 수 있도록 사이버 네트워크를 형성시켜나가기 위한 의도였다. 말하자면 구글어스에
표시해 둔 지점들을 클릭하면 그 장소에 관계를 맺고 있는 1000여명의 사람들 이미지가 방사형으로 나타나고
이미지 하나하나는 그들 삶에 얽힌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는 연결고리가 되는 셈이다.
빨간
카드 인물들은 일상의 특정 공간에 대한 입체적이고 객관적인 조망이자 드러날 듯 말 듯 그 공간과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들춰내는 작업으로 <NOW IN DEAIN MARKET>(2008), <That
Palace>(2008~2011), <Thanks>(2008), <Thank You>(2008~2009) 등이
그 예이다. 이 가운데 <대인시장>은 제8회 광주비엔날레 때 실행된 ‘대인시장-복덕방프로젝트’의 하나였다. 역시 빨간 카드를 든 40여명 시장사람들의 흑백사진을 공간과 사람들의 관계를 이어주는 시장 통로에 배너로 높이 띄워 설치한 작업이다. 시장에 뿌리내려 수 십 년씩 삶을 엮어 온 상인 개개인이나 개체로서 가게들,
그 개별존재들을 공공미술이라는 문화영역으로 끌어들여 시장공동체의 주인공이자 공적 구성원으로서 존재를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그래서인지 시장 냄새를 물씬 풍기는 수더분한 모델들의 모습은 낯선 예술작품의 주인공이 된 것에 대한 멋쩍음과
함께 억척스런 삶에서 배어든 투박함과 정겨움이 담겨있다.
같은
개념의 연작 중에 아시아문화전당 공사장 가림 벽에 시민들의 얼굴이미지들로 글자모양을 구성해낸 <Thank
You>(2008~2009)가 있다. 도시와 시민의 공적ㆍ사적 관계에 대한 공동의
메시지를 다중에게 노출된 공공시설물에, 그 주체인 시민들의 이미지로 글자형태를 구성해낸 작업이다. ‘감사’의 메시지는 정치적 또는 문화적인 의지와 욕구들이 펼쳐지고 집약되는 도시단위로서, 또는 시민 개개인의 삶의 터전이자 현실공간으로서 광주라는 도시와 시민의 관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과 시민사회 사이에 맺어지는 상호 긍정적 관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환기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공모에
당선되면서부터 사진촬영을 시작하였는데,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전당공사장 주변을 오가는 시민들에게 작업의
취지와 의도를 설명하고 촬영하여 700여 개의 이미지를 모아내었다. 각
글자를 이루는 픽셀 같은 작은 이미지들은 모두가 촬영날짜와 시간이 적힌 빨간 카드를 들고선 시민들의 모습이다. 도시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초상이자 아시아문화중심도시의 실질적 주체인 지역사회 개별존재들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빨간
카드 인물초상 연작들은 수많은 인물 이미지들을 모아 군집을 이루기도 하고, 각각의 사진들이 갖는 개체성을
큰 작품으로 확대시켜 보여주기도 한다. 영산강변이나 구 전남도청 앞 민주광장 같은 정치ㆍ사회ㆍ역사적으로
첨예한 이슈가 연결된 장소에서 농부나 공수부대원, 시민 등 그 현장과 직접 관련된 인물상을 촬영해서
라이트박스로 비춰 보여 주거나 서로 다른 입장의 대비되는 관계를 마주보게 설치하여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을 잇기도 한다. 물론 이 가운데는 그 장소를 찾은 방문자의 모습을 기념사진처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긴 통로 양쪽에
라이트박스 작품을 마주 세워 서로 무관할 수도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를 갖게 된 담양에서도 현지의 장소성을 연결하기 위해 죽녹원과 메콰세콰이어 길을 찾은 젊은 인연의 모습을 같은 방식의 인물사진으로 담아내거나, 담양과 관련된 인물들의 사진작업을 포함한 것도 같은 연장선에 있다.
한편으로
빨간 카드 작업은 아니지만 장소와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미지 기록과 연결로 같은 개념에서 제작된 것이 2009대인예술시장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진행했던 <당신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입니까?>이다. 현장작업이 가능하고 간편하기도 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용해 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인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작업실을 찾은 사람들을 촬영하고 사진 아래에 질문에 대한 답을 적도록 해서 벽면에 계속 줄지어
붙여나가는 방식이다. 시장이라는 공간과 그 곳의 주인공인 상인들의 관계를 이미지로 옮겨내는 작업이자, 낯선 이방인인 작가가 공공미술 형식을 빌어 시장상인들에게 다가서는 관계 맺기 작업이었다. 시장에서 수십 년씩 생업을 일궈 온 상인들의 존재를 예술이벤트 형식으로 엮어 공적 문화영역으로 드러내면서, 그 두텁고 진솔한 인생현장에 어느 날 문득 예술작업이랍시고 찾아 든 자신과는 다른 방식의 삶의 틀과 낯선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서는 문화적인 접근행위였던 셈이다. 번성했던 지난날과는 너무나 달라진 시장의 과거와
현재 사이를 되살려내는 기억의 연결 작업이면서, 전통시장이라는 공간적 틀과 무시로 달라지는 시장손님들과의
관계를 유연한 고리로 맺어내는 관계 맺기 프로그램이었다.
소통의
매개로서 언어와 음식
권승찬의
작업에서는 아시아문화전당 공사장 아트펜스의 <Thank You>처럼 수많은 인물이미지들을
사용하면서, 문자를 작품의 주된 매개형식으로 사용한 예들이 많다. 가령, 5ㆍ18 30주년 기념전으로
2010년에 쿤스트할레광주 유리면에 작업했던 <언어는 액션이다> 경우는 후라이팬에서 튀어나가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 영어 알파벳의
대문자 소문자들을 역동적인 구성의 빨간 글자무리들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많은 작업들이 작가 개인사와
관련돼서 발상되고 만들어지듯이 이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언어소통의 한계를 요리로 풀어내었던 본인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의재창작스튜디오나 안양 석수시장 레지던시프로그램 중에 만난 미국ㆍ중국작가들과 서로 언어소통이 전혀 안되는 상황에서
몸짓과 음식으로 관계를 밀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리와 액션과 언어를 작품 이미지의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음식이나
요리는 그가 평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고자 할 때 자주 활용하는 방법이다. 2009, 2010년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시장 골목 집 2층과 옥상 공간에서 각각 4개월여 진행한 OK공공프로젝트의 밥집코너도 이제 갓 새내기인 권승찬
김은영 부부공갈단이 낯선 시장에서 밥 짓고 반찬 만들어 이 공간을 찾는 사람들 누구나 서로 한솥밥의 정을 나누고 소통의 끈을 엮으며 유대감을 맺도록
판을 벌여 준 생활 속의 공공문화프로젝트였다. 더불어 식당방 옆에는 공공하우스방을 꾸며 노름 아닌 놀이를
즐기도록 하고, 리폼디자인 작업공간을 두는가 하면 공공옥상을 활용하여 예술가의 체력단련, 이벤트, 파티를 위한 제생공간으로써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하였다.
일상
현실과 꿈꾸는 욕망 사이
권승찬의
글자를 매개로 개인의 일상과 외부세계를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을 잇고자 하는 작업들은 유리 벽에 컴퓨터 커팅에 의한 검정 선들로 창밖
풍경을 옮겨놓는 공간드로잉작업들과 연결된다. 가령, 2006년도
시립미술관 전시실의 중간의 포켓공원 같은 사각 공간 유리벽에 <모여라 꿈동산>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한 귀퉁이 풍경과 글자들을 채워놓았었다. 그
당시 작업실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을 검정 선들로 묘사하면서 그 옆에는 집에서 쓰는 물건들의 브랜드 이름들을 역시 검정글씨로 커팅하여 가지런히 배열해
채웠었다. 미술관은 많은 작가들의 작품발표와 성장을 꿈꾸는 욕망의 공간이고, 집이란 곳도 생활 속에서 좋은 물건들을 모아들이는 사적 욕망의 공간으로 본 것이다. 이 같은 욕망의 꿈들을 모아 닫힌 전시관에서 외부세계로 터진 유리 벽에 풍경과 브랜드들을 펼쳐놓은 것이다.
같은
연장선에서 2005년도에 광주 롯데백화점 전망엘리베이터 유리 벽에 작업한 <창 밖을 보세요>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과 꿈의 괴리, 인위적으로 꾸며진 헛된 공간이나 멋진 샘플들을
보며 부추기는 인간의 욕망은 망망한 희망사항일 뿐, 금새 사라지고 마는 현실과 비현실의 착각과 자각
사이를 오가게 된다. 고급스런 백화점의 치장된 공간과 물건들을 쇼핑하다 문득 내다보게 되는 것은 자취
집 창밖 바깥 현실풍경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집 또한 현실적인 공간은 아니다. 작가로서, 자연인으로서 현실을 풀어나가기 위해 일을 만들며 바깥세상을
돌아다니지만 집에 틀어박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긴요한 세상현실로부터 격리되거나 단절되는 폐쇄공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유형은 2005년에 광주 신세계갤러리 쇼윈도우 전시벽면에 작업했던
<엄마! 알았어요>도 마찬가지다. 역시 교회 옆에 자리한 자취 집에서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을 검은 선들의 이미지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 바로 집 옆에 교회가 있기도 했지만, 교회 다닐 것을 끊임없이 종용하는
엄마의 성화 때문에도 친숙해진 교회의 이미지를 옮겨와 엄마 뜻을 따르지 않는데 대한 심적인 부담이 엉킨 일상 현실로서 교회가 보이는 창밖풍경을
간결한 선들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아울러 <Historical
traces of contemporary age>(2008)의 경우도 유달산을 대낮처럼 밝히는 전광조명이나 화려한 루미나리에
불빛을 비유 삼아 이 시대의 과도한 욕망들을 풍자하면서 그 과잉욕구들이 파열로 이르지 않도록 식혀주고 싶은 충동을 자취 집과 물뿌리개 실루엣으로
표현한 컴퓨터프린트 작업이다.
개인사와
콤플렉스를 문화영역으로 치환하기
권승찬은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발상을 얻거나 직접 소재를 취해오는 작업들이 많다. 특히 한동안 즐겨 다루었던 연작주제 <자취 집 시리즈>는 고교시절부터 여러 번 옮겨 다녔던
자취 집의 기억들을 그 집 대문과 함께 주소와 방값, 통학 소요시간 같은 지극히 개인사적 기록들을 캔버스에
글자로 새겨놓기도 하고, 자취 집 싱크대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빈 그릇처럼 누적된 욕망과 번잡스런 일상, 권태로 위태로워 보이는 세상과 현실에 대한 얘기들을 담아내기도 한다.
개인사적
체험이나 지난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들이기는 군복 천에 숫자나 문자들로 군복무의 흔적을 기록하는 2002년의
작업에서도 확인된다. 가령, 높이 2.5m에 길이가 9m정도의 대형 군복 천에 본인의 군번인 ‘9230750’과 입대에서부터 예비군 관리업무 등을 거쳐 제대하기까지 행적을 문자로 서술하기도 하고, 얼룩무늬 중 갈색부분 윤곽을 따라 계급장 색에 가까운 주황색 형광 펜으로 선을 그려 넣으며 복무기간 18을 크게 써넣기도 한다. 또한 명함발송전 <Hello! My Name is Gwon Seungchan!>도 대학을 갓 졸업한 신예작가 입장에서
미술계라는 거대한 사회를 향해 명함을 돌리며 일종의 등단인사를 건넸던 작업도 소소한 개인사의 자취들을 바깥세상으로 드러내어 사회 속 한 존재로
줄을 잇고자 한 작업들이었다.
이 같은
태도는 그가 느끼는 자신의 사적 세계 한계를 예술작업을 통해 위무하고 벗어나려는 부단한 행위들이라고 볼 수 있다.
2007년도 의재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인터뷰 중에 “제 얘기는 콤플렉스에서 시작됩니다. 이를테면,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 성격에 대한 콤플렉스, 가정환경에 대한 콤플렉스…. 이런 것이 작업 안에 본격적으로 스며든
것은 대학 졸업 이후의 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동안 주거공간에 대한 작업을 계속 해왔거든요. 공간에
대한 문화적ㆍ사회적 해석을 작업으로 풀어 나간 거죠… 원활하지 못했던 언어구사 능력이 작품을 통해서 간결한 텍스트로 관객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이것도 아마 저의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지가 지시하는 것을 다시 중복해서 텍스트가 지시하는 식의 전략적 방법일 수도 있고요…”라고 작업의 바탕을
밝힌 바 있다.
사회
공공영역에서 문화행동의 실천
권승찬의
작업에는 사람과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접근이 많다. 작가 본인의 주변 환경 또는 외부세계와
소통의 줄을 잇기 위한 작업도 많지만 사회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존재들을 서로 엮어내기 위한 작업들이기도 하다. 물론 그 존재란 개별존재로서 사람만이 아닌 수많은 모습으로 피고지고 펼쳐지는 사람들의 갖가지 삶, 시대사의 흔적, 공동체 문화와 연관된 특정한 공간과 장소들을 포함하는
의미이다.
이런
류의 작업 중에 2004년 제5회 광주비엔날레 때 현장프로젝트 [그 밖의 어떤 것]에 참여하여 진행했던 ‘예술그룹 바셀린프로젝트’의 <마이너리티-터미널프로젝트>가
있다. 비엔날레의 기획의도에 맞춰 버스터미널이 광천동으로 옮겨간 뒤 옛 대인동 터미널 주변에 남게 된
주변상가나 상인들의 현재 삶을 지금은 없어졌거나 빛 바랜 과거 풍물사진들과 겹쳐 되짚어보는 작업이었다. 세상살이의
오만 표정과 애환과 희비들이 흘러가고 흘러 들어 왔을, 외지로 들고나던 소통의 통로였던 버스정류장 주변에서
그런 시대의 풍경을 안고 살았을 상가나 사람들이 도시의 변화와 함께 황금빛 은행과 화려한 백화점 그늘 아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를 지역민들의
지난날 회상과 함께 되돌아보는 작업이었다. ‘구 광주터미널의 사진을 구합니다’라는 광고문구를 5ㆍ18자유공원 울타리와 도로 육교에 대형 현수막으로 내걸고 시내
교통안내전광판에 안내문구를 송출하면서 직접 사람들로부터 수집한 사진을 5ㆍ18자유공원 막사공간이나 터미널 현장에서 전시하였다.
소외지역
주민들을 주 대상으로 공공프로젝트를 지향했던 바셀린프로젝트 그룹결성 후 첫 작업인 터미널프로젝트에 이어 2006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소출력 라디오방송국 프로그램’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작업이었던
광주 ‘중흥3동 아홉골이야기’ 프로젝트를 비롯해, 서울ㆍ안양ㆍ안산ㆍ성남ㆍ담양
등지에서 열 두 차례 주민방송국을 열었으며, 현지 주민들로 기자나 작가, 스탶들을 짜 마을과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와 소식들을 나누는 프로그램들이었다.
권승찬의
말은 “한 개인으로서의 ‘나’와 타인(관람자ㆍ일반인)으로서
‘너’의 어떤 공통성과 서로 다른 감성적 인식 차이에 관한, 흥미를 도출해 나가는 작업들”이라 한다. “극히 사적인 것들(장소ㆍ시간ㆍ습관ㆍ정서ㆍ관심사 등)을 공적인 곳에 배치하고 나열하여, 일종의 사회 병리 현상적 관점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기를 행하는 과정들”(작가노트 중)이라는 것이다. 콤플렉스에 의한 것이든, 사는 방식 때문이든 개인적인 삶의 영역들은
때로는 견고한 아성이기도 하고, 또 바깥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고 움츠려 들기도 하는 유기체일
수도 있다. 세상사는 중에 자기 삶을 둘러싼 유무형의 외적 요소들과 무수한 관계를 맺고 사회공동체라는
세상을 이루어가는 개별존재, 그런 개체와 공동체 두 영역 사이에 문화적인 길 트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조형언어로서 사진이나 회화적인 작업을 비롯해, 광고 같은 시각이미지나
음식과 방송프로그램과 별난 이벤트들을 자유롭게 활용해서 세상 속 관계를 만들어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개인과 세상 사이, 위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실재이면서 비현실적인 공간
사이, 사이버공간과 세상 속 작은 공간 사이에 소통의 소재나 매체, 표현과
공유의 형식을 만들어가면서 소통의 물길을 계속 열어가는 것이다.
1프로와 99프로의 간극에서 소통의 미학을 찾는 예술가
윤익 /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1과장
일상에서 우리는 예술이라는 단어를 매우 많이 접하게 된다. 예술은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며 미술은 그중 하나의 영역임에 분명하다. 현대에 이르러 미술이라는 장르의 예술은 더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현대미술이라는 단어를 전혀 생소하게 인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이와는 매우 확연하며 다르게 진행된다. 현대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현대적 교육과 삶을 영위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대미술은 매우 낯설고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조금은 우화적인 표현이지만 이제 일반 대중들 에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마치 예술이 이해하기 힘들어서 길다는 의미처럼 자칫 와전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는 현대미술이 지니는 커다란 모순이며 또한 아쉬움이다.
“Life is so long, but there is nothing to do. The world is so big, but there is nowhere to go.”(인생은 길지만 할 일이 없다. 세상은 넓으나 갈 곳이 없다.)는 작가 권승찬의 예술을 표현하는 일종의 슬로건이며 그의 작품 명제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이는 “한 나라 혹은 한 사회 구성원으로써 개인이 보편적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와 욕망이 때때로 타인과 비교되어 상상, 소통, 행위, 긍정의 빈곤에서 오는 상대적 무력감에 대해 관객과의 말 걸기” 라고 한다. 이를 조금 설명하자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많은 일을 이루어 내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세계의 곳곳을 다녀보고, 이른바 성공했다는 말을 주위사람들에게 들어보고 싶은 바램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스스로가 진정하게 자아적 주체로 살아감과 동시에, 한편으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은 모두가 공감하며 또 그에 따라 많은 노력을 하지만 모두가 그 노력의 대가를 공평하게 누리지 못하고 때로는 삶의 출발선 역시 동일한 기준점의 적용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좌절과 자책감을 조장하게 하여 일종의 포기심리에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부정적인 요소를 만연하게 한다.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자신의 빵을 해결하며 살아간다. 이 또한 모두가 다 아는 우리의 삶에 관한 모순이며 아쉬움이다.
과거에 보통사람이라면 자신을 소개하며 등장했던 특별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작가 권승찬은 진실로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보통세상의 보통예술가 권승찬이다. 엘리트주의와 출세지향적인 오늘날의 세상은 진실로 우리 사회의 특정계급에 속하는 1프로만을 위한 세상처럼 느껴진다. 마치 우리의 삶의 목표 역시 성공만을 위한 삶이며 남에게 인정받고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서 남의 앞에 설 수 있는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모두가 성공한 1프로의 삶을 살 수는 없다. 1프로의 주역과 99프로의 조연뿐이라면 우리주변 대다수들은 과연 실패한 삶인가 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진정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가치기준은 무엇일까? 작가 권승찬은 우리사회가 인식해야하는 전형적인 삶의 가치의 기준을 아마도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99프로의 조연들에게 그의 공감대를 맞추어 내는 듯 하다. 이러한 그의 발상은 그의 작품이 획득하는 특성으로 작가의 개인적인 표현을 통하여 사회적 소통의 코드로 드러난다.
2009년부터 아시아문화전당 공사가림막 펜스에 <THANK YOU>라고 쓰인 그의 대형작품을 보아도 작가의 관점과 삶의 철학이 드러난다. 멀리서 보면 단순하게 THANK YOU 라고 쓰인 간판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바램과 삶의 기억들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의 인물사진으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이다. 예향광주에 명운이 걸려있는 아시아문화전당을 생각하는 광주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작가의 조형적 언어를 통하여 공적인 발언으로 예술작품의 옷을 입고 도심공간에 자리하였다. 권승찬 작가의 이작품은 수많은 광주의 보통사람들이 참여하여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며 문화전당건립현장의 벽에 “감사하다”는 의미의 언어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여러 가지 정황의 해석으로 더욱 웃음을 주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진정한 광주의 주인들이며 광주에 살아가는 광주사람들과의 소통과 조율 없이, 어느 날 발표된 아시아문화전당건립이나 오늘날의 진행과정들이 일반대다수의 시민들에게는 어찌 보면 그저 일부 특정 층의 그들만의 잔치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2009년과 2010년에 진행된 대인예술시장의 <OK공공식당프로젝트>역시 권승찬 작가의 타인들과의 소통에 관한 방법론을 볼 수 있었던 멋진 기회였었다. 시장 한 켠에 마련된 2층 공간에 차려진 소박한 식당에서 동료작가들과 서로 간에 당번을 맡으며 진행된 일종의 음식서비스는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하는 소통의 공간으로 그림이나 조각이 걸린 미술전시공간에서의 소통과는 다른 보다 실질적인 대화와 웃음들이 난무하였다. 미술문화판의 생산자들인 작가들 간의 대화와 가끔은 동네상인, 일반관람객들까지 참여하였던 OK공공식당은 어릴 때 즐겨보던 OK목장의 결투와 크로스업되며 우리시대의 진정한 주인공들인 일반 보통작가들과 일반 보통시민들이 삶과 예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문화공간으로 진행되었었다.
간결하고 위트 있는 그가 즐겨 구사하는 메시지들은 일종의 블랙코미디처럼 우리에게 잔잔하고 소박한 감동을 준다. 세상의 모든 일에 때로는 전혀 간여할 의사가 없는 듯 제3자처럼, 대수롭지 않은 듯, 무관심한 듯 한 그의 표정과 말투, 제스처 역시 그 나름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광주시립미술관의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은 권승찬 작가를 “1프로와 99프로의 간극에서 소통의 미학을 찾는 예술가”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2012년 빛展 작가로 선정하였다. 그는 우리가 믿고 있는 절대적이거나 통념적인 가치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전을 사고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돈키호테와 같은 예술가이며 그의 작업 내면에 깊게 깔려있는 보통사람들과의 소통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