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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腦)’와 ‘방(房)’이라 불리는 무대-이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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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腦)’와 ‘방(房)’이라 불리는 무대


이원곤(단국대 교수, 미디어예술론)


건축공간, 혹은 방(房)은 인간에게 어떤 곳인가? 사전적 정의가 어떠한지는 차치(且置)하고, 나름대로는 ‘막히고 열린 공간의 구성에 의해 어떤 삶의 영위를 가능하게 하거나, 생명을 보호하고, 외부와 소통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장치가 아닐까’ 정의해 보고 싶다. 가장 작은 생명을 담는 세포도 알고 보면 하나의 방이지만, 크게는 사회적 활동을 위한 공공건물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생명 내지 인간활동의 거점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하나의 공간이지만, 삶이 지속되면서 기억이 축적되고 행동의 패턴이 정착되면, 마침내 일정한 문맥을 가진 장소로 진화하는 것이다.

정정주의 ‘공간모델’들은 대개 작가가 직접 거주하거나 방문한 경험이 있는, 실재하는 건물을 재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들은 ‘장소’들이지만, 실제로는 마치 추상적인 데이터 공간에서 CG 모델링으로 태어난 듯, 차가운 모노크롬(monochrome)의 형상으로 빚어져 있다. 그것은 주로 종이, 나무, 알루미늄과 같은 판재를 절단, 조립하는 제작방법의 자연스런 결과이겠지만, 이것은 현대의 건축물들이 기하학적 그리드를 따라 구축된 기둥, 슬라브 그리고 재단된 판재로 구성된 사실과도 부합된다.

그런데 이 모델들에는 고유한 장소들의 명칭이 부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상실하고 부유하는 듯이 보인다. 일찍이 E. 렐프(Edward Relph, 1944-)는 현대도시의 ‘모든 장소가 겉모습뿐 아니라 분위기마저 동일화 되어버려서 개성이 없어 보이는, 그래서 피상적 경험밖에 주지 못하게 되어버릴 만큼 장소의 아이덴티티가 약해져 버리는 것’을 ‘몰장소성(placelessness)’이라고 했는데, 정정주의 이 모델공간들은 제각각 그 장소의 목적에 맞게 적용된 제각각의 코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표적으로는 <Metaphysical Star>가 보여주는 것처럼, 지금은 물리학에서 더 이상 논의되지도 않는 ‘에테르’와 같은 신비로운 ‘그 무엇’으로 채워진 우주가 탄생시킨 혹성처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 작가가 연출한 공간은, 살던 사람이 이사가고 난 빈집처럼, 디테일과 기물, 그리고 사건의 기록마저 말끔히 지워져 버렸고, 그러기에 어쩌면 실재하는 장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든 사건과 사람이 사라진, 혹은 그 위에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날 무대같기도 하다.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 앞에 펼쳐진 시간은 아마도 ‘인적이 사라진 새벽’ 쯤 일 것이다. 마치 E. 앗제(Eugene Atget, 1857-1927)가 찍어냈던 파리의 새벽거리처럼, 이 ‘연극이 끝난 무대’는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불빛만 환하게 그 ‘비어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방문객들은 그 추상공간=무대에서, 그것이 모방하고 있는 장소의 기억을 부활시킬 수도 있고, 이미 지워졌을 법한 사건들을 상상할 수 있다. 비록 신체가 진입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가짜 리얼리티이기는 해도, 애써 몰입하고자 하는 순진한 상상력 정도는 허용할 만한 모델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장치’ 속에 장착되어 움직이는 카메라와 외부의 영상 때문에, 관객은 어느새 자신이 바로 그 ‘살아있는 무대’의 유령이며, 다른 시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작은 가짜 리얼리티와 그것을 들여다보는 관객 사이에 성립되었던 시선의 위계는 미궁에 빠지고,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 보고 보여지는 관계의 순환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응시가 일상화된 나머지 ‘사물들조차도 나를 바라보는’ 도시라고도 할 수 있고, 바라보던 나 자신조차 그 스토리텔링에 이끌려 들어가고 마는, 우리의 뇌를 닮은 극장과 같은 장치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새로운 작품에서는 이전의 공간 속에 환영처럼 떠돌던 기억들 대신, 인간들의 모습이 상(像)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는 점이 달라졌다. <40개의 방들>(2010)에서는 CCTV화면과도 같고 스냅샷 같은 40개의 영상이 각각 알루미늄 칸막이 공간 안쪽에 수납되어 있다. 그것은 세포와도 같은 프레임 속에 제각각 생존하는 삶의 군상이다. 그리고 원래는 하나의 모니터에 격자형으로 배치된 작은 영상들의 집합이지만, 그 앞에 알루미늄 칸막이 때문에 관객이 그 영상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각도는 허락되지 않고, 나머지 칸들의 영상은 알루미늄 칸막이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빛의 흔들림으로만 지각된다. 작가는 이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의 눈이 행사할 수 있는 응시의 본질이며, 육안으로 접할 수 있는 리얼리티의 한계이자 특성으로서, 기계가 포착한 카메라영상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듯하다.

이러한 시선의 법칙은 <빌라(수색로)>(2010)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작품에서는 마치 한밤중의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제각각 명멸하는 TV불빛들처럼, 그것들은 모두 그 주민들의 삶-정확하게는 그들의 뇌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려내고 있는데, 24개의 공간내부에 하나씩의 소형모니터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은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접근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수색로에 있는 군인아파트를 모형화한 이 건물은 실재하는 것이면서도 함석판의 재질감과 일렁거리며 산란되는 빛에 감기면서 생경한 풍경이 되는데, 이 방들에서 '주민'들이 각자 자신의 상처, 그것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와 퍼포먼스로 풀어나간다. 그것들은 이 둥지 속의 주민들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어떤 경험을 했으며, 거기서 얻은 상처를 소화/반추/치유하며, 또 삶이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의 행렬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강하게 통제된 조명을 이용해 구조적 실재감을 강조하면서 그 안에서 응시하는 시선과 의식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설정을 명료하게 한 것이었다면, <40개의 방들>에서 관객의 시선은 셀(cell)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빌라(수색로)>에서는 동시에 발화(發話)하는 주민들 사이를 배회하게 된다. 시점의 불안정성과 세계의 복잡성이 강조된 이 작품들이 이전의 것들에 비해 분명히 후기(post)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진화인지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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