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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축소판 ․ 가상 실내의 파노라마 - 정정주가 구축하는 공간_강수미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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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축소판 ․ 가상 실내의 파노라마 - 정정주가 구축하는 공간


강 수 미 (미학자)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거인국이나 소인국에 대한 상상은 인간이 그만큼 자신의 신체를 기준으로 외부세계를 잰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나 당신처럼 2 미터가 채 안되는 사람들이 지각하는 세계의 크기 비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반대로 그 익숙한 비례에서 크게 벗어난 대상을 상상하거나 만들어 본다. 때로는 아주 작게 만들어 위력적인 시선으로 즐기고, 때로는 엄청 크게 이미지화해서 거대함이 주는 숭고에 기꺼이 삽입되고자 한다. 예컨대 1 밀리미터 단위로 만들어진 정교한 미니어처를 만지는 즐거움과 거대한 해일이 도시 전체를 덮어 씌워 버리는 재난 영화를 보며 느끼는 공포-감상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기준으로 세계를 지각하는 인과관계 속에서 우리는 ‘공간’을 정의한다. 생활감각에서 공간은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것’이다. 나를 받쳐주고 둘러쌀 정도로 넓고 큰 공간. 내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공간. 공간을 다루는 미술가는 분명 우리의 이러한 상식적 공간지각의 의표를 찌르거나 역설적으로 뒤집음으로써 작품의 성공을 꾀할 것이다.


1. 공간-신체-지각의 두 차원들

정정주는 특정 공간에 대한 건축모델을 만들어 우리 ‘시선 아래’ 볼 만한 것으로 펼쳐 놓는다. 그와 동시에 바로 그 건축모델의 내부를 찍은 영상이미지를 우리 ‘눈앞’에 까뒤집어 투사한다. 말하자면 전자는 인간 아래 세계의 축소판(miniature)이고, 후자는 그 미니어처의 실재 내부공간이자 인간을 둘러싼 가상의 한 공간 이미지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것으로서의 공간을 정정주가 만든 건축모델을 통해 축소해서 파악하고, 우리보다 훨씬 작아서 내부로 들어갈 수 없는 그 세계의 축소판 내부를 영상이미지를 통해 대리 체험한다. 이를 소인국과 거인국에 떨어진 걸리버의 경험으로 은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모델과 영상이 연동하는 정정주의 특수한 공간 작업 속에서 재미있는 내포(內包)와 외포(外包) 관계의 ‘공간-신체-지각 차원’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이 두 차원을 가진 공간 관계를 양말(혹은 장갑)로 생각해 보면, 당장 눈앞에 정정주의 작품이 없어도 어떤 선명한 감각이 우리에게 붙잡힐 듯 하다. 납작 붙어 있던 양말에 손을 집어넣으면 꼼지락거릴 정도의 공간이 생겨나는데, 그 공간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손이 촉감으로 느끼는 공간이다. 어느 순간 급하게 손을 빼내면 그 속 공간은 확 뒤집혀 밖 공간이 되면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이 만졌던 공간감은 시각적 표면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안이자 밖인 공간, 비가시성이자 가시성의 지각을 가능케 해 주는 형식과 내용이 한 몸인 구조. 그 구조가 만드는 두 차원과 가변적 전환이, 내가 양말의 메타포를 빌어 제시하고 싶은 정정주 작품의 핵심이다. 어린아이라면 ‘이해’가 아니라 ‘감각’으로 이 단순하면서도 교묘한 구조와 그 전환이 주는 재미를 알아채고 반복할 것이다. 반면 어른은 정정주가 만든 건축모델을 조망하면서, 그 속 공간을 더듬는 영상이미지로 축소판 세계 내부를 시각적으로 대리체험하면서, 발터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인식에 도달할 수도 있다. “형식과 내용, 외피와 외피에 덮여 숨겨진 것, ‘선물’과 주머니는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조금 더 나아가, 정정주 작품들을 예증으로 하여 감각과 인식이 지각이라는 소실점에 맺힌다는 것, 혹은 다른 두 차원이 연동하며 전환된다는 것을 덧붙여 주장하고 싶다.


2. 모델은 인간보다 작고, 이미지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정정주가 2001년 독일에서 했던 전시의 자료영상 중 한 장면에는, 감상자가 그의 작품을 즐기고 받아들이는 실제 양상을 드러낸 상징적 장면이 있다. 기숙사 5개 방을 최소한으로 재현한 작은 모델과 그 내부 이미지를 텔레비전 모니터로 보고 있던 한 남자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자꾸 모델 ‘안’이나 모니터 ‘뒤’를 기웃거린다. 우리는 그의 행동을 모델 내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모델 안에,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자신을 반대편(모형 기숙사 실내, 우리가 그를 보고 있는 자리)에서 투영하고 있는 이미지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는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다. 모델 안에 장착된 카메라는 하나의 눈이 되어 그(감상자)-우리(그의 관찰자)-그(감상자 자신의 영상이자 카메라가 보는 것)로 이어지는 ‘시선의 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뿐만 아니다. 정정주가 만드는 건축모델은 작은 가짜 공간이지만, 그 내부를 찍은 이미지는 사실성이 넘치기 때문에 영상만 보고는 그 공간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큰 공간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료영상의 한 남자처럼 자꾸 모델과 이미지 뒤로 가보게 되는 것인데, 당연한 얘기지만 모델은 작아서 들어갈 수 없고, 영상이미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보는 이가 보이는 이이며, 보는 자리는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에 노출된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 일망타진의 판옵티콘(panopticon)이 벤담식의 위계적 원형감옥으로만 실현되거나 기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앞서 양말을 들어 논했듯이 공간의 성질과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의 감각은 부단히 전도될 수 있고, 그로인해 우리의 지각 또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정정주 작업이 우리 인식에 주는 자극이다. 그러나 분명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 공간이 아니라 모델로서의 공간이 주는 자극이었고, 우리 몸 전체가 아니라 우리 인식에 주는 자극이었다.


3. 상황에서 운동으로

<거실>, <높은 집>, <기숙사>, <거리 매점>등 정정주는 비교적 하나로 떨어지는 공간을 건축모델로 만들고, 그 내부 영상을 외부로 프로젝션하는 작업을 해 왔다. 다소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2003년 제작 전시한 서울시립미술관 모델이나 서대문 형무소 모델 또한 단일한 공간이었고, 감상자는 직접 그 시뮬레이션 된 공간 속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부 카메라가 운동하며 우리 눈앞에 송출하는 영상을 ‘마치 자신이 움직이듯’ 느끼며 작품 밖에서 보아야 했다. 그리고 전시장 어딘가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서 그렇게 모델과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을 또 다른 영상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감상자는 작품 안에서 ‘운동’하기보다는 작품이 투영하는 ‘상황’을 작품 밖에서 시각적으로만 감상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최근작 <일산 덕이동 로데오거리> 또한 전시방식과 그 감상의 방식 면에서 전작들과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건축모델의 크기가 상당히 커지고, 한 건축물의 모형이 아니라 여러 건축물이 블록(block)을 이루는 방식으로 전시되기 때문에 감상자의 신체적 경험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지구에 불시착한 괴 비행선처럼 생긴 신도시의 상가 건물이 중심에 놓인 거리 모델을 조망하다가, 인근 체육관이나 편의점 모델로 이동하면서 경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광주신세계 갤러리 개인전에 타이틀을 <바디스케이프(Bodyscape)>로 설정한 것은 타당해 보인다. body와 scape를 조어한 이 전시 제목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내가 주목하는 바는 정정주의 작품들이 보는 이의 신체보다는 카메라가 비추는 풍경 혹은 상황에 집중했던 데서 신체와 풍경(상황)이 하나로 결합되는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덕이동 로데오거리와 편의점과 체육관이 현실과는 또 다르게 건축모델로서 블록을 이루고 있는 전시장에서 감상자는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 그 풍경을 조망만 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세부를 보기 위해 또는 그 모델과 영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메커니즘을 파악해 보기 위해, 그리고 모델들이 일종의 세트를 이루고 있는 장소를 거닐면서, 블록화 된 작품 속으로 뛰어든다. 일순간 감상자의 신체 또한 작품의 일부로 편입되며, 그 곳을 비추고 있는 영상이미지 속에서 풍경의 일부로 녹아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바디스케이프>는 신체/풍경으로 분절되지 않고, 어느 쪽이 주체인지 규정될 수 없는 상태에서 부단히 전도되고 변화하는 작품이 된다. 앞서 양말의 뒤집힘으로 돌아가서, 그 양말의 안과 밖 공간을 전도시켰던 것, 양말의 겉껍질과 그것이 감싸고 있는 것(혹은 형식과 내용)이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케 한 것이 ‘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그리고 정정주가 만드는 ‘예술작품’이 ―모델이 만드는 가짜공간과 그 공간 풍경을 보여주는 영상이미지― 실재와 가상을 넘나들도록 하는 것, 작품이 하나의 사물이자 풍경이자 살아있는 현실이 되도록 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그것은 바로 당신, 정정주의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 감상자의 신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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