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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용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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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투시경, 그리고 초월의 감각 연습하기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1.

 김진화의 예술이 다루는 세계는 언제나 인간의 지식과 대화의 중심을 차지해 왔으면서도 여전히 잘 밝혀지지 않고 있는 세계다. 그곳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생각들의 출처다. 그곳은 (우리가 자주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경험과 언어가 적절하게 버무려지곤 하는 빈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의지로 통제되거나 조절되지 않다. 오히려 그곳의 실체가 의지와 감정을 조정하고 생각을 통제한다. 히포의 어거스틴을 빌자면, 그곳이야말로 존재의 실체적 중심이다. 김진화의 작업은 바로 이 내면의 실체를 탐색하는 것이고, 그로 향하는 단계들을 밝히며 경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김진화의 작품들을 대하면서 광주시립미술관의 김희랑은“보이는 것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의 세계까지 표현해내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특권”이라고 소회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작가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김진화는 작가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이 의무, 특히 이 시대의 작가들이 쉽게 망각하곤 하는 그 임무에 지금껏 성실하게 임해 왔다. 

 김진화의 작품은 하나의 구조요 장치다. 우선 그것은 존재의 내면에 관한 구조다. 그것은 여러 단계, 층, 겹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그 각각의 단계는 존재의 심리, 정신, 마음이 얼마나 많은 요인들, 경험과 기억, 실존과 이상, 욕망과 상실의 요인들로 되어 있는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각각 상이한 단계들을 밟으면서 보다 심연으로 향하게 하는 이 장치는 존재를 구성하는‘원형적 정서’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마음의 투시경과도 같다. 

 이 구조는 일반적인 오브제들과는 정 반대의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작업의 결과는 외부로 부풀려진 형태나 형식이 아니라, 내부로 향하는 함몰이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물의 표면이 아니라, 구조의 이면이다. 그것은 세계가 아니라,‘또 다른 세계’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15세기 사람 토마스 아 캠피스(Tomas a Kempis)의 말대로 “길거리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을 침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김진화의 작업은 거리가 아니라 침실을 보여주는 것에 해당된다.“내면성을 원하는 사람은 군중을 뒤로 해야 한다”고 캠피스는 이어 말한다. 김진화의 세계 역시‘안’으로 향하는 구조고, 내면으로‘들어가는’길이다. 여기서 군중에 대한 지식은 취급되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산책이나 길거리를 배회할 때의 흥분은 가라앉는다.   

 김진화가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단지 김진화 개인의 사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방이기도 하다. 존재의 심연으로 향할수록 그곳에는 한 개인을 넘어서는 것들이 자리한다. 작가는 그‘감추어진 곳’이이야말로 존재의 비밀을 담보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내면은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의 동기가 형성되는 곳이다. 언어가 숙성되는 양조장이기도 하다. 예컨대 외모의 과도한 치장은 거의 내면의 콤플렉스에 기인한다. 집착적으로 꾸미고 장식하는 여성의 심연에는 타인을 향한 높은 벽이 존재한다. 과시적인 남성성의 출처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면이 사건이 일어나는 실체적 장소다. 세상의 모든 결과들은 일어나기 전에 그곳에 이미 예고된다. 그곳에서 지각과 인식, 경험의 밖으로 흐르는 시간의 외부가 감지된다. 그곳에서 시간은 연대기적이거나 순차적이지 않다. 그 공간은 중첩되고 축적되며, 접히고 접혔다 다시 펴진다. 그곳에서 우리는 역사 자체-역사의 한 순간이 아니라-와 조우하고, 인간 동료들과 신비로운 방식으로 대면하며 언어를 빌지 않고서도 대화할 수 있다. 

 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는 이성과 합리적 사유로는 잘 접근할 수도, 풀어낼 없는 공간이다. 그것은 밖(Out)의 세계로는 계량될 수 없으며, 물질계를 이루는 것들과는 다른 것들에 의해 구성되고 성취된다. 그렇기에 그에 상응하는 보편 어휘나 객관적 설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세계, 그 원형은‘나만의’것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작가가 어떤 주관적인 경험의 결과들을 자져다 놓건, 그것들은 우리 모두의 오차없는 텍스트로 화하게 된다. 작가가 자신의 더 깊은 곳을 탐색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이상하게도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작품 <거울의 방>은 존재 내적 실체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루는 자기애적 속성을 다룬 것으로, 김진화가 구축하는 내면의 구조를 이해하는 예로서 적절하다. 외부로부터 가장 가까운 층이자 내면의 가장 외부인 첫 번째 층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붉은 꽃의 수술을 보여준다. 이는 공격적이고 정복적인 쪽으로 나아가려는 남성성의 자기애를 보여준다. 두 번째 층은 본성을 자연의 모습으로 전달함으로써, 존재론적 특성으로서의 자기애의 다른 측면을 부각시킨다. 세 번째 층은 꽃에 비유된 여성의 자기애를 다루고 있다. 이 층들의 마지막에는 거울이 설치되어 있다.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자기애적 본성들의 단계를 지난 관람자들은 그 끝에서 자신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의미의 층들을 경유하면서, 결국 끊임없이 욕망의 충족이란 전쟁터로 존재를 몰아대는 자기애의 심리적 구조를 성찰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  

 김진화의 별자리들이 꿈으로 향하는 통로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별자리들은 현대인의 일그러진 초상에 관한 비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자주 등장하는 사수자리의 캔타우루스(Centaurus)는 서로를 향해 활을 겨누는 경쟁적 일상 속에서 매몰되어가는 현대인을 의미한다. 거꾸로 된 의자에 앉아있는 카시오피아는 허영기로 스스로를 은폐하며, 무의식적으로 자기방어적인 삶을 영위할 뿐인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김진화는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현대라는 시점과 그 시점이 생성해내는 삶의 부조리한 형식들을 문제삼는다. 물질적 사유의 폭주, 내면세계의 고갈과 황폐, 그리고 그 골을 더욱 깊게 하는 인간성과 인간 상호간에 대한 불신, 일테면“인정이나 함께 나누는 사랑, 인간 사이의 신뢰보다는 돈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자본사회의 삭막함… ”하지만 작가가 그렇게 하는 장소는 준엄한 법정이 아니다. 부조리한 실존을 다루는 방식 또한 고발이 아니라 직시하고 보고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김진화의 존재 해부는 그토록 적나라하면서도 절망이나 고통과는 무관한 것이 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가 현대의 병리학을 직시하고 보고하는 장소는 다름아닌‘하늘’이다. 하늘은 그에게 초월적 차원의 상징이다. 그곳을 바라볼 때 비로소 심연을 교란하던 세계의 문제들이 각각 제자리를 찾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 살아가다 가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 위를 날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 할 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자유를 느끼게 된다.”(김진화) 

 김진화의 세계가 자신을 옥죄는 것들을 다룰 때조차 냉정한 지적과 비판에만 머물지 않는 것은 결국 그의 이러한 영혼의 태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세계는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으며, 그렇기에  더욱 지나쳐버릴 수 없는 동시대의 동료들에게 제시하는 진단과 처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 처방에는 존재의 내면을 이루는 실체들, 욕망과 상실의 구조들, 일상과 이상의 충돌들과 그것들의 구조적인 연결고리 등에 대한 흥미로운 이해들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가 내놓는 처방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시라도 바쁜 일상사의 시계를 멈추고 서서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너무나 분주하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쉬지도 못하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잡기 위해 그리 분주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일까? 모든 것들이 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멈추어 서서 별자리를 보는 것은 단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이 시선의 상승이 우리로 하여금 굳은살졌던 내면의 감각을 다시금 포촉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선은 동시에 존재의 심연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김진화는 한 쪽으로는 끝없이 깊고 복잡한 존재의 내적 실체로 향하는 단계들을 지속적으로 개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의 별자리들을 채집한다. 한쪽으론 아픈 실존을 분석해내면서 다른 한쪽으론 별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한 초월의 감각을 연습한다. 김진화의 작가적 통찰과 그 실천으로서의 예술작업은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실은 이 두 길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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