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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동방박사 _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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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 - 動방박사

이대형 (대표, Hzone)



근본적으로 이이남 작품은 해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양과 서양, 삶과 죽음, 유한함과 무한함,과거와 현재, 존재와 표상, 사물과 언어, 중심과 주변 따위의 이원론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동양이 서양을 낳고 서양이 동양을 낳는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이남 작품의 역설적 서사구조는 이원론적 위계질서에 길들여진 논리로는 정확히 읽히지 않는다. 이는 이원론적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놓치고 말았던 중간계에 “무정형의 질서”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의 논리가 아닌 감성의 논리에서 비롯된 “빈틈”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중간계에는 위트와 유머가 끼어들 여지가 많아진다. 비록 이 중간계가 작가의 상상력과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무정형의 질서” 즉 “빈틈”을 채우려는 관객의 반응과 욕망이 더해져 그 모양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이남의 디지털 미디어 작업은 “기계적 상호작용” (interactive)의 순발력 대신, 기꺼이 “감성적 상호작용” (interaction)의 여운을 선택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번 전시 타이틀 <동방박사>는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뜻하는 “동녁 동”자 대신 “움직일 동”자를 차용해, 작품의 서사구조가 다양한 방향으로 열려 있고, 그 방향 또한 자율적으로 정해질 수 있다는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탄생한 공간은 이원론적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공간이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시간구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 그러나 이 같은 의도된 “빈틈”을 만들기 위한 이이남의 전략은 매우 구체적이고 논리적이며 치밀한 계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환원구조에서 출발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반복되는 사계절의 순환, 소녀가 노파로 다시 소녀로 시간의 논리를 거스르는 젊음의 환원,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다시 삶으로의 환생 등 이이남의 작품은 환원구조를 고집한다. 그것도 단순히 시간의 역전 현상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의 비판의식은 사회고발적이다. 금강전도, 2010>는 인류의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폐허가 된 금강산에 포탄을 대신하여 눈 형태로 내리는 문자를 통해 이를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곳에 가고 싶다, 2010>에서는 스포츠 중계에서나 보일 법한 클로즈업과 숨겨진 장면을 포착하기 위한 다양한 앵글을 통해 가장 고즈넉해야할 옛 풍경을 다이나믹하게 바꿔 버린다.


이이남 작품 속에서 공간은 시간과 같은 층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디지털 미디어 작품 속에서 시간의 역할은 공간의 그것보다 상위에 놓인다. 시간이 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시간 개념을 먼저 산정해야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간에 대한 상상과 해석을 먼저 끝낸 다음, 그 위에 어울리는 공간을 매칭 시키는 방법으로 사건의 이음새가 연결된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대부분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뚱맞은 시간과 공간의 만남이기에 불협화음으로 보일 만도 한데 관객에게 보여지는 결과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의도된 간극이 결코 불연속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다름 아닌 “프레임”의 활용에 있다.


프레임은 “안”과 “밖”을 구별시키는 장치이다. 또한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는 프레임의 속성은 합법적인 “왜곡”을 가능케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심과 주변, 주인공과 배경을 구별해 주는 프레임은 공간을 둘로 나누는 훌륭한 경계선이다. 그런데 이이남은 이 프레임의 전통적인 역할을 해체해 자기식으로 재구성한다. 그에게 있어 프레임은 공간과 공간을 나누는 경계가 아닌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또한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의 소통을 유도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통은 작품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일어난다. 일종의 창문이 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과 그 너머로 보이는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 내는데, 중요한 것은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 스테이지와 관객 사이에 모니터를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이 브레히트적 소격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개미 루이 14세, 2010>에 등장하는 프레임은 억압과 권력의 상징으로 변질 된다. 전통적인 서양화 액자에 그려진 루이 14세 초상화와 그 옆에서 작품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의 모습은 마치 감옥의 쇠창살 안에 갇힌 주인공과 이를 지키는 간수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미술관이라는 문맥 속에 갇힌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더욱더 가두어 버리는 프레임을 희화하고 있는 작가의 통찰력은 미술관 안에서 화석화되어가는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봐야한다.


작품 속 권위와 억압의 장치로서의 프레임을 해체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개미라는 에이전트를 등장시킨 것이다. 개미들이 몰려들어 프레임 속 루이 14세 그림을 한 조각 한 조각 씩 프레임 밖으로, 다시 미술관 밖으로 끄집어내어, 옆 모니터로 옮기게 만들었다. 한 조각 씩 움직이게 만든 단순 노동이 엘리트의 상징인 미술관의 경비 벽을 뚫은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미술관 프레임에서 자유로워진 루이 14세는 다시 관객의 눈앞에 놓인 프레임 안에 갇히는 아이러니를 노출한다. 이는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세계 명화를 모니터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는 이이남의 전략과도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개미의 모습으로 주로 등장하는 작품 속 에이전트는 이후 나비로도, 잉어로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약자이고, 자연이고, 속임수 없이 단순하다. 그래서 권력, 전쟁, 영웅주의에 대항하며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한다. 때론 개미가 되어 노트르담 대성당을 소치의 산수화 속으로 옮겨놓기도 하고(노틀담 성당과 소치의 산수화, 2010), 때론 나비가 되어 전투기들의 공습을 쫓아내기도 한다(도포, 역사 다시쓰기, 2010).


이이남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서양의 명작과 동양의 명작이 서로 소통하는 이야기 구조에 있다. 특이 하게도 그가 선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고흐, 쇠라, 마네, 모네 등, 빛을 중요시했던 인상주의와 조선시대 혹은 명청시대의 산수화로 요약된다. 빛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영상형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명화를 찾다보니, 대상이 아닌 빛을 그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미지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이남에게 있어 동양화는 죽어 버린 과거의 시점을 의미한다. 여기에 작가는 생명을 부여하는 장치로 빗방울, 꽃, 새싹, 나비, 보름달 등을 등장시킨다. 때론 사계절로 변화는 풍경을 부여해 순환하는 시간을 입히기도 한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영상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쉽게 넘어 버리는 위트와 유머를 자랑하게 된다.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같은 목적 아래 이야기가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작가가 동양과 서양의 명화를 해체하면서까지 만들어 놓은 중간계의 완성된 모습으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 일단 하나의 프레임을 가지고 다양한 시점과 공간을 분리시키기도 하고 연결시키기도 하는 전략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화면 밖이 아닌 안에서 유효한 것이다. 이 한계에 이이남 작가가 도전해야 한다. 미디어 아트란 화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소비하는 다양한 방법의 구현 속에서 발전하는 속성을 지녔다. 사람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動방박사”를 기다리고 있다.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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