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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준 '이이남 되살아난 전통의 끝나지 않는 여정(旅程)'-2012 굿나잇 아날로그 전(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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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 되살아난 전통의 끝나지 않는 여정(旅程)

이향준



1.
무심히 주변을 지나치다가 어디서 본 듯한 동양화 앞에 멈춰 선다. 잠시 후, 그림에서 멈춰 있던 나비와 벌이 움직이고, 꽃잎은 바람에 나부끼며, 물고기는 뛰어놀기 시작한다.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살짝 놀란 채로 뒤로 물러서고 보니, 이 움직이는 동양화가 담겨 있는 화폭의 새로운 성격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은 평면 디스플레이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이 전시된 벽면의 아래쪽 한 구석에는 제목과 사이즈, 그리고 이것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이이남의 이름과 작품들은 이렇게 사람들의 눈에 처음 들어온다.

2.
그의 작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디스플레이는 종이」라는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다. 이것은 전자매체인 평판 디스플레이와 그림의 배경이 되는 종이라는 매체를 우리의 머릿속에 강하게 결합시킨다. 이 결합은 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의식적 사고를 할 필요조차 없다. 일단 그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디스플레이의 역할이 동양 고전 회화에서 화선지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사람들이 간과하고 지나치는 것은 이이남의 작품이 이 개념적 은유를 구체화시키기 전에는 자신의 머릿속에 그와 같은 생각이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지각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갖는 동적인 성격이다. 원래의 그림은 종이 위에 그려져 고정적일 뿐만 아니라 분할 불가능한 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디지털 시스템에 의해 재처리된 것이다. 정보를 기본적인 단위로 분할할 수 있는 디지털의 특성상 불연속성은 재조정 과정을 통해 복제와 변형을 가능하게 만든다. 정지했던 새의 이미지는 공간을 이동해서 불연속적으로 배치되지만, 그것은 프레임의 연결을 통해 우리의 시각에 동적인 속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래의 정보 속에 전혀 다른 맥락으로부터 기인하는 정보를 삽입할 수도 있다. 동양화의 한 복판을 위 아래로 가로질러 날아가는 비행기의 이미지가 삽입될 수 있는 것도, 기하학적인 선들이 횡단할 수 있는 것도, 심지어 동양화의 이미지 속에 전혀 문화적 맥락이 다른 인물과 동작들이 병치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매체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이미지는 문화적 차이를 갖지만, 정보는 등질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디지털 시각 매체를 다루는 창작자의 표현의 한계는 사실상 그의 상상력의 한계인 것이다.

이처럼 개념적 은유를 통한 혼성과 디지털은 굉장한 근친성을 갖는다. 디지털은 혼성을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기에 편리하고, 혼성은 디지털에 의해 거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보장받는다. 남는 것은 무엇과 무엇의 혼성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 동양의 고전 회화 전통은 어떻게 해서 이이남의 작품 속에서 새로운 예술소(藝術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는가?


3.
디스플레이가 종이라면 「TV 는 액자」이고, 「영상은 그림」이다. 이러한 연관된 개념적 은유가 사람들에게 손쉽게 받아들여지는 인지적 이유가 있다. 영상 자체는 정지 이미지의 연속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림은 하나의 정지 이미지이다. 따라서 영상은 그 자체로 정지 이미지의 축적이다. 이런 유사성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영상은 그림」은유도 사람들의 두뇌에서 활성화되는 데는 인지적 어려움이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이남의 작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효과를 가져 온다. 하나는 강력한 보편성이다. 동양의 회화 전통에 약간이라도 이해가 있는 사람은 이이남의 작품이 그것의 현대적 재현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한다. 이이남의 작품이 여타의 아방가르드적인 미디어아트와 달리 난해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익숙한 것의 차용(借用) 혹은 혼성 때문이다.

이 혼성은 이이남의 작품에 두 가지 대비되는 속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게슈탈트적인 두 가지가 충돌하면서 공존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동양 회화의 시각적 재현은 그의 작품에 일종의 원전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차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전(original)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그 작품의 원전 속에 담긴 것이 똑같이 이이남의 작품 속에도 담겼을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추측하게 된다. 즉, 감상자는 일차적으로 이미지에 집중하게 되고, 이렇게 할 때 그는 아주 오래되고 권위 있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익숙한 어떤 문화적 전통과 대면하고 있다고 여긴다. 누구든지 아주 오래된 전통이 현대적 양식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그의 작업은 방식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내용의 핵심적 함축이 알려진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그 매체적 특징은 배후로 소실되고 나타나지 않는다. 디스플레이 자체의 매체적 특징이 지각되는 것은 이미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볼 경우다. 이미지는 낡은 것이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은 새 것이다. 부분적으로 낡고 부분적으로 새로운 것, 낡은 내용의 새로운 형식을 통한 재현.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러한 양식의 서구적 표현이라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양적인 표제어다. 즉, 이이남의 작품은 아주 낡았으면서도 새롭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혼성은 이미 고전적인 사례들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 건축에서 차경(借景)의 원리나, 시가 문학에서 차운(借韻)의 전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더욱 극적인 사례로는 저명한 시구들을 선(禪)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비유로 차용하는 경우도 거론할 수 있다. 차경의 경우는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자연의 광경을 보고 즐기는 풍경이라는 차원으로 의미를 전이시킨다. 차운은 이미 존재하는 시구의 운자(韻字)에 해당하는 특정 부분을 빌려 자신의 시어 속에 녹여냄으로써 형식의 반복과 내용의 차이를 즐기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선종의 선사들은 당대의 저명한 시구들을 곧잘 선의 경지에 대한 묘사로 애용하곤 했다.

예를 들어 법연(法演)이 인용한 것으로 알려진 통속적인 연애시 가운데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소옥아! 소옥아!” 불러도 시킬 일은 없지만 頻呼小玉元無事

다만 사랑하는 낭군에게 목소리 듣게 하려고 祗要檀郞認識聲


이 구절은 남편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일도 없으면서 몸종인 ‘소옥’의 이름을 부르는 부인의 수줍은 애정을 노래한 것이다. 문학적 독창성은 부인이 직접적으로 남편을 부르지 않고,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종의 이름을 부른다는 간접화법에 담겨있다. 선종의 선사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적인 깨달음의 속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수행자는 그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도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다른 이름을 부르지만 그것마저도 그것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다. 소옥을 부르는 부인이 수동적으로 남편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선의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을 다하고도 깨달음의 순간이 자기에게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개념적 은유를 빌려 말하자면 「선의 수행은 사랑」이고, 「깨달음이란 사랑하는 이의 돌아봄」인 것이다.

차경과 차운, 연애시에 대한 선종의 재해석은 모두 다 동일한 것을 공유한다. 아날로그적인 연속성을 갖는 자연은 창문이란 프레임을 통해 재해석되고, 동일한 운은 다른 시정(詩情)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론적 맥락을 획득하며, 연애시는 선의 깨달음이 가지는 수동성에 대한 은유가 된다. 하나의 대상이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이처럼 다양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이다. 이이남은 그것을 평판 디스플레이라는 매체를 통해 동양 회화 전통을 차용해서 구체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4.
하지만 이러한 작업의 특성은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이이남의 혼성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어서 이해하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같은 이유 때문에 모방하기도 쉽다. 동양 회화의 전통은 그 자체로 풍부한 텍스트를 제공한다. 하지만, 동양에는 이외에도 차용 가능성이 풍부한 수많은 다른 전통들이 존재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구양순(歐陽詢)와 안진경(顔眞卿) 왕희지(王羲之)로 대표되는 서예 전통은 어떤가? 우리는 동양의 문화에서 서예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인 장르일 뿐만 아니라, 회화와 서예가 얼마나의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제 추사(秋史)의 「부작란(不作蘭)」을 이이남과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려는 임의의 예술가를 상상해보자.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이남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부작란」에 포함된 많은 구절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배경과 글자의 색깔이 수시로 변한다. 난의 이미지는 여전히 이이남의 것과 유사하게 흔들거릴 것이다. 그의 작품은 ‘난초를 안 그린지 스무 해, 우연히 참된 성품 그려내었네[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와 같은 문자의 변화를 제외하면 이이남의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상상의 예술가는 자신이 이이남이 주목하지 못한 부분에 주목했다고 할 것이다. 동양의 서예 전통을 자신의 미디어아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이남이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이이남의 기존 작품에서는 이러한 타이포그라피에 대한 주목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즉, 이이남은 시각적 이미지의 중요한 오브제로 서예의 가능성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디 서예뿐이겠는가? 불교의 수많은 시각적 만다라와 탱화 전통, 도가 사상의 수많은 신화적 이미지들 역시 이이남과 유사한 작업에서 중요한 혼성의 오브제들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워홀(A. Warhol)과 리히텐슈타인(R. Lichtenstein)의 일화를 통해 간단하게 유추할 수 있다. 즉, 워홀은 만화를 소재로 삼으려고 했던 자신의 팝아트에 대한 구상을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보고 난 후 철회했다. 그리고 그는 브릴로 상자를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화와 브릴로 상자의 차이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의 차이를 만들었다. 익숙한 혼성의 결과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선 그것은 진부한 것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을뿐더러, 남들도 나와 비슷하지만 차별화되는 양상으로 진척시킬 수가 있다. 키취를 받아들였던 팝 아티스트에게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를 주장하려는 아티스트라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그의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이남에게 근본적인 질문 한 가지를 환기시킨다. 즉, 그는 어떤 종류의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5.
이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이이남이 다루는 매체 자체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다루는 매체는 평면 디스플레이인데, 그것의 상투적인 이름은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상품 가운데 하나인 TV다. 이것은 곧 이이남의 개념적 통합 작업이 대중매체로서의 TV와 동양 전통 회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화폭으로서의 TV가 거의 모든 가정에 구비되어 있는 대중매체이자 기성품이라는 점이다. 그가 이 매체를 택함으로써 마주치는 것은 약간 이상한 상황이다. 매체 혹은 화선지로서의 TV는 이미 거의 모든 가정에 구비되어 있다. 그런데, 그 TV들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예술의 내용은 어디에 있는가? 만연한 화폭과 부재하는 내용이라는 이러한 특징은 TV가 엄연히 하나의 대량생산 제품이라는 상업적 성격과 결부될 때 보다 첨예한 갈등을 드러낸다.

비록 리히텐슈타인이 싸구려 만화를 자신의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박영욱은 그의 작업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만화에서 뽑은 장면을 스케치하고, 그것을 실물 투영기로 확대해 캔버스에 전사시킨다. 그다음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스텐실, 채색, 윤곽선 등을 사용하여 캔버스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리히텐슈타인은 소재를 만화에서 따왔을 뿐, 그의 작업은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이남의 작업은 전자적 작업과 수작업의 혼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리히텐슈타인과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의 매체가 캔버스가 아니라, TV라는 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포한다. 즉, 하나 밖에 없는 TV를 만들어 기성품을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킬 것인가? 아니면 모든 TV에 적용가능한 보편적 예술 형식을 확립할 것인가? 전자에 기울면 아방가르드적이 된다. 반면에 후자에 기울면 팩토리를 운영했던 워홀의 확장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팝 아티스트들을 여전히 동요시키고 있는 아티스트와 비즈니스맨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은 이이남의 작업에서 여전히 문제될 소지가 있다.


6.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이남의 이번 전시가 가지는 다양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개념적 통합은 평판 디스플레이와 동양 회화 전통의 혼성이라는 차원을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진행되는 수많은 종류의 혼성을 권장한다. 니체(F. Nietzsche)는 이와 유사한 통찰을 이렇게 표현했다. “천재는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이며 머리에는 천사의 날개까지 달고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이남은 동양의 저명한 회화 전통이라는 천사의 날개와 평판 디스플레이라는 사람의 몸통을 결합하고 있다. 니체는 여기에 아직도 혼성되어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아 있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혼성은 네 발 짐승의 하체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실제로 이이남이 이 혼성의 경계를 더욱 확장시키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수의 작품들이 있다.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의 이름이 대변하는 예술 세계는 동양 회화 전통의 원래 외양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는 것들에 단단히 묶여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상승하는 날개로 은유되는 동양의 회화 전통과 같은 아름다움의 세계가 아니라, 땅에 얽매인 짐승의 네 발과 같은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마저도 자신의 혼성 대상으로 포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추함이 아직 그의 혼성 목록에 올라있지 않다면 그는 매체의 새로움과 작업 방식의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직도 추함의 수용에서 머뭇거리는 근대와 현대의 경계 사이에 애매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이남의 기존 작업으로부터 예상 가능한 혼성 작업을 상상하면 새로운 가능성에의 탐색을 몇 가지로 구체화 할 수 있다. 동양 회화 전통은 일종의 리얼리즘에 해당하는 형사론(形似論)과 표현주의에 해당하는 전신론(傳神論)의 이항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혁(謝赫)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운생동(氣韻生動)은 전신론에, 응물상형(應物象形)은 형사론의 표어에 해당할 것이다. 이이남의 기존 작업이 이 가운데 하나를 극단적으로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전신론에 대응하는 동양화의 가장 고도화된 형태로서 득의망상(得意忘象)의 경지를 염두에 둔 숭고화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재발견했던 생명의 숨결(souffles vitaux)―들뢰즈(G. Deleuze)가 차용하는 이 개념은 놀랍게도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표현 속에 나오는 기(氣)의 번역어이다―이 골격을 이루고, 붓의 필치가 빚어내는 우주의 선(ligne d'univers)들이 교차한다는 동양화의 정신성을 고도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선종의 대가들이 연애시를 선의 메타포로 고양시키는 것과 유사한 작업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TV-선(禪)’의 경지를 추구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이남의 기존 작품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 방향에는 이런 숭고화 경향이 의외로 강한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네 발 짐승의 하반신으로 대변되는 추함의 경계 너머로 혼성을 감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현대 예술의 자기 비평을 나름대로 발전시킨 메타 비평적 작업들이 포함될 것이다. 20세기 미술사의 유명한 스캔들 가운데 하나인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의 「예술가의 똥Merde d'Artiste」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질문의 의미는 자명하다. 자신의 똥을 밀봉한 90개의 깡통을 제작한 후 거기에 예술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이런 행위는, 예술을 자본주의 시대의 배설물로 언급하는 철저한 자기 비평의 정신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이남의 작업이 이러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까?

「뒤샹의 방」에서 이이남은 변기에 소변을 보는 뒤샹(M. Duchamp)의 모형물과, 별도로 전시된 변기의 내부에 포함된 디스플레이가 소변보는 장면을 재생하는 작품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이남은 뒤샹을 소환하고, 오웰(G. Orwell)을 환기시킨다. 뒤샹을 자신이 다루는 매체와 결부시킴으로써, 이이남은 사실 오웰이 상상했던 디스토피아에서 매체가 차지하는 역할을 회의하면서, 비데오라는 매체의 표면과 이면이 갖는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탐구했던 백남준(白南準)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이남이 기존에 확립된 자신의 예술적 관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렇다면 이이남은 이러한 자기 비평적인 현대 예술의 메타적 성격에 철저한 아방가르드적 아티스트를 꿈꾸는 것일까?

마지막 방식은 자신의 작업을 직접 사회적 현실과 대면시키는 것이다. 이이남의 이번 전시가 5.18을 언급하는 작품들이나, 남도의 풍경을 포함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기존의 이이남의 작업이 가지는 특성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회적 발언을 하는 작품들과 예술적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그것은 설령 차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새로이 구축되어야 할 미지의 실험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이남에게 최소한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통로가 열려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이미 그의 작업에 잠복해 있고, 어떤 것은 이번 전시를 통해 언급하기 시작되었다. 이 시도들은 기존의 자신의 작업에 대해 비평적 관점을 제기하고, 그것의 한계와 가능성의 폭을 측량하고자 하는 예술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이 외에도 아날로그에 안녕을 고하고, 디지털의 예술 경험을 소개한다는 측면에서 이번 전시가 갖는 다양성들 속에는 아날로그적 경험의 추억과 새롭게 대두되거나 가까운 미래에 경험될 디지털적 시각 경험의 특징들이 다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러 백남준의 과거 작품들과 유사하게 설치된 브라운관 TV의 탑들, 플랙시블 평판 디스플레이의 확장이 가져다 줄 스크린 벽의 시각 경험을 보여주는 벽 전체에 투사되는 새들의 자유로운 움직임, 자동차의 전면이나 심지어 측면 유리에도 탈부착이 가능하게 될 투명 디스플레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품 등등이 그것이다.


7.
결론적으로 커다란 두 개의 축이 이이남의 전시를 관통하고 있다. 하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시대에 자신이 다루는 매체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시각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다. 두 번째는 이이남이 자신이 확립한 기존의 관행을 부분적으로 제약하고, 그 작업의 한계를 일신하려는 탐색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한계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의 이이남을 형성한 그 독창성의 새로운 전형을 확보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예술가는 어쨌든 그렇게 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유행하는 대중가요의 가사가 예언한 것처럼 “시간이 모든 걸 대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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